버락킴의 극장

셜록 봤다면 심심할 <오리엔트 특급 살인>, 메시지 얻고 긴장감 잃었다

너의길을가라 2017. 12. 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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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몰락과 함께 근대가 태동했다.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급속히 진행됐다. 신 중심의 세계관은 인간 중심으로 옮겨갔고, 해방된 이성은 과학의 진보를 가져 왔다. 놀라운 성취였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세계를 뒤덮었다. 모든 것이 명쾌하게 구분되고, 모든 문제가 선명한 답을 찾을 듯 했다. 햇살에 쫓겨 사라지는 안개처럼 모호함이 물러가는 것인가. 옳고 그름에 분명한 구분이 존재하고, 인간의 지성은 타협 없이 '중간은 없다'고 선언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일직선 상의 선(線)에 구분점이라 할 만한 건 분명치 않았다. 어쩌면 답은 더욱 흐릿해졌다. 그것이 어디 근대뿐이랴. 근대에서 출발한 기차는 오랜 시간을 달려 현대에 이르렀지만, 종착점이 어디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년)을 통해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분명한 구분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케네스 브래너는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그 질문이 현대에도 유효하다고 외친다. 


이스탄불 시르케지 역(Sirkeci)에서 출발해 부다페스트, 빈, 뮌헨 등을 거쳐 파리까지 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승객 한 명이 잔인하게 살해 당한 채 발견된다. 피해자는 사업가 라쳇(조니 뎁)인데, 그의 몸에선 무려 12개의 자상(刺傷)이 발견됐다. 도대체 누가 이토록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단 말인가. 완벽한 밀실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의 용의자는 총 13명이다. 물론 그들은 저마다 빈틈없는 알리바이를 가졌다. 이대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살인자는 이 안에 있다!" 


공교롭게도 그 열차에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가 탑승해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벨기에 태생에 경찰 출신인 포와로는 천재적인 두뇌를 뽐내는 '세계 최고의 탐정'이다.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굵은 콧수염은 그를 상징하는 포인트이자 균형을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아닌게 아니라, 포와로는 아침마다 먹는 달걀의 크기가 똑같아야 직성이 풀린다. 영화엔 나오지 않았지만, 토스트도 9등분이 된 것만 먹을 만큼 괴짜스럽다. 사람들에게 "넥타이 좀 똑바로 매주겠나?"고 요구할 만큼 비틀어진 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포와로의 추리 방식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탐정'이라 하면 셜록 홈즈처럼 사건 현장을 누비면서 증거를 수집하리라 생각되지만, 포와로는 '면담' 방식을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를테면, 용의자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특이점을 발견하는 식이다. 표정과 말투에서 거짓말을 포착하거나 악센트나 발음에서 어색한 부분을 찾아내곤 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도 마찬가지다. 포와로는 용의자 선상에 오른 13명과 개인 면담을 실시해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한편 범인을 찾아낸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범인을 찾는 데 모든 걸 쏟아붓지 않는다. '누가 범인인가?'라는 질문에 '범인은 바로 너야!'라고 답하는 명쾌함이 추리의 카타르시스라 할 만 하지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그 쾌감을 전달하기에 급급하지 않는다. 난항을 겪어야 마땅한 추리 과정은 손쉽고, 사건의 해결도 일사천리다. 신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완벽한 탐정은 용의자'들'의 연막을 간파하고, 사건의 본질에 성큼성큼 다가간다. 오히려 뻔한 '반전'이 밝혀진 뒤에 이 영화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도덕적 우위가 전혀 의미 없어지고, 명백했던 옳고 그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선명하리라 여겼던, 그래서 손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선과 악의 구분이 허무해진다. 추리를 끝낸 후 13명의 용의자를 한 곳에 모아둔 자리에서 포와로는 주저한다. 진실을 밝힌 것인가, 아니면 눈 감을 것인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중간 지대'의 발견은 그의 논리적 사고를 멈추고,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에서 배우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가히 명품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배경으로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에서 4대밖에 없는 6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해 환상적인 영상미를 선사했다. 고전의 향취를 뒤살리면서 낭만적인 느낌을 전달하기까지 한다. 또, 페넬로페 크루즈, 주디 덴치, 미셸 파이퍼, 윌렘 대포, 데이지 리들리 등 명배우들은 극의 무게감을 더할 뿐 아니라 캐릭터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해 몰입감을 높였다. 



하지만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에르큘 포와로라는 인물의 매력이 부족했던 점은 안타깝다. 섹시함으로 무장한 셜록 홈즈(베네딕 컴버배치)의 아성을 넘기엔 너무 아저씨스러웠다고 할까. 또, 살인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고, 진실을 추리해가는 과정이 상당히 불친절했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겐 상당히 급작스럽고 심지어 엉뚱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소설과는 달리 시간의 제약을 받는 영화에서 13명의 용의자를 모두 담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족한 인물 설명 탓에 관객들은 포와로에 의지한 채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도덕적 딜레마를 파고들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 점은 훌륭했지만, 역시 긴장감이 빠진 영화가 주는 지루함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영국과 중국, 러시아, 스페인 등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제작비 5,500만 달러의 4배에 가까운 흥행 수익(약 2억 260만 달러)을 거둬들였다. 또, 속편인 <나일 강의 죽음> 제작도 확정됐다고 한다. 속편에선 포와로가 좀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질 수 있을까. 또, 잃어버렸던 긴장감을 살려내 쫄깃한 추리 영화를 그려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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