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눈치 보기 바쁜 인권위, 스스로 걷어찬 독립 기구로서의 지위와 역할

너의길을가라 2015. 3. 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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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UN)은 1946년 열렸던 경제사회이사회 두 번째 회기에서 "국제인권법의 국내적 실현을 위해 각국에 특별한 인권기구 설치 적극 권장"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두 번의 쿠데타 등 군사 정부의 독재 치하에 놓여 있던 대한민국에 인권기구 설치는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물론 당시에는 일반 국민들도 인권(人權)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존재 자체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유엔의 권장이 있은 후 무려 31년이 흐른 1997년 11월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인권법 제정 및 국민인권위원회 설립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그렇게 탄생한 국민의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에 인권기구 설립을 포함하고『국민인권위원회설립준비단』발족시켰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와 권한 문제를 놓고 법무부와 인권단체는 갈등을 벌였다.


법무부는 인권기구를 산하기관으로 만들고자 했고, 인권단체는 인권기구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렇게 3년 동안 갈등이 지속된 끝에 2001년 11월 25일 드디어 누구의 간섭이나 지위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구로 국가인권위원회 출범됐다.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조(목적)

이법은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독립성)
① 이 법에서 정하는 인권의 보호와 향상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위원회"라 한다)를 둔다.
② 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입법, 사법, 행정 등 3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국가기구로 만든 이유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오로지 인권을 위해 소신껏 할 일을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위원장과 위원들의 임기를 법으로 보장하고, 국가기관을 상대로 조사할 권한까지 부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대통령이 위원장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는 현재의 시스템으로는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다. 현재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인권위의 현실을 보면 그러한 지적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한겨레


초대(初代) 김창국 위원장은 정부가 추진하던 이라크 파병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성명서를 채택하는 등 대통령과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랬던 국가인권위원회가 한 순간 풍비박산나게 된다. 과연 어느 시점일까? 제4대 인권위원장을 맡았던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2013년 2월 18일 CBS < 김현정의 뉴스쇼 >에 출연해 인권위와 관련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 내용의 일부이다.


◇ 김현정 > 뭘 그렇게 경험하셨어요? 재임시절에 뭐가 그렇게 힘들고, 회의감을 느끼고 그러셨습니까?

◆ 안경환 > 인권위원회에 제가 약 2년 9개월 있었나요? 그동안 한 절반 정도는 노무현 정부 아래 있었고,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이명박 대통령 아래 있었는데요. 인권위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거는 두 대통령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 김현정 > 두 대통령 다 마찬가지입니까?

◆ 안경환 > 그럼요. 원래 인권위는 대통령하고 사이가 안 좋아야 되는데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사적 자리에서 굉장히 불쾌하고 화를 내고 해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아, 인권위가 원래 그런 거라고 덮어줬어요.' 참아주고 그거를 외면했으면 했지, 저를 그렇게 박해는 안 했거든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이 대통령이 저를 한 번도 안 만나줬지 않습니까?

◇ 김현정 > 그런가요?

◆ 안경환 > 업무보고를 하도록 돼 있는데 독립기관이지만 그러나 국회의장과 대통령에게는 정기적으로 업무보고를 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업무보고를 거절했죠. 그리고 만나지도 않고 그리고는 뒤로 온갖 박해를 다했죠.




안경환 전 인권위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이 됐지만, '독립기구'라는 지위에 걸맞게 인권을 위해 대통령과도 끊임없이 맞섰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참여정부에서는 인권위가 독립 기관으로서 그 지위와 역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안 전 위원장의 말처럼, 노 전 대통령이 인권위를 불편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인권위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MB정부가 들어서면서 인권위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안 전 위원장의 말을 빌리자면, '뒤로 온갖 박해를 다했'다고 한다. MB정부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인권위를 아예 없앨 궁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위원회와 합쳐서 없애는 방안을 모색했고, 대통령 직속기구로 옮기는 인수위 안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의 반대와 비난 때문에 독립기관으로 존속시키긴 했지만, 기구 자체를 축소(40명 감축)시키는 박해를 가했다.


-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 -


2009년 7월부터 현재까지 인권위를 이끌고 있는 현병철 위원장은 더 이상 추락할 데 없는 곳까지 인권위를 망가뜨렸다. 현 위원장이 편향된 이념을 갖고 한 쪽으로 치우져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고,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역대 인권위원장들이 정부와 '맞짱'을 뜨면서까지 지켜왔던 독립기구로서의 위상과 역할이 눈에 띄게 위축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급기야 지난해 4월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는 5년마다 하는 정기 등급 심사에서 국가인권위원회에 '등급 보류' 판정을 내렸다. ICC에 가입한 2004년 이래 지금까지 A등급(최상위 등급)을 받아왔던 역사에 먹칠을 한 것이다. 인권위의 현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 인권위는 인권위라는 이름조차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2014년 한 해동안 인권 침해를 당했다는 진정(陳情)은 1,538건이 접수됐다. 하지만 인용 건수는 고작 8건에 불과했다. 인용률은 0.52%로 200건 당 1건 꼴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수치가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인권위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인권위'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더 이상 대한민국은 '인권 침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인권 강국이 되었단 말일까?


지난 2월 15일 제2차 상임위원회에서는 65개의 쟁점 항목을 선정해 정부노트 초안을 만들었다. 이 정부노트는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 인권규약 이행 정도를 감시해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UNHRC)에 참고 자료로 제출될 예정이었다. 초안이 최종안이 되는 과정에서 65개였던 쟁점 항목은 34개가 줄어 31개로 쪼그라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삭제된 항목을 살펴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 미등록 이주민과 그 가족의 인권

▲ 기업의 강제노동

▲ 언론기관의 독립성

▲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경찰의 채증

▲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및 가압류


이쯤되면 '난 인권위원회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수준 아닐까? "논의 과정에서 분량을 줄이거나 늘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내용의 중요도와 심각성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김형오나 인권정책연구소장의 말처럼 명백히 자유권을 침해한 사례가 존재하는 데도 정치적 논란이 두려워서 혹은 정권의 압박이 두려워서 입을 닫는다면 인권위의 존재 이유는 없는 것이 다름 없다.



인권위법 제50조에는 "진정 조사 및 조정 내용과 처리 결과 등을 공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권고나 의견 표명을 인권위 누리집에 소개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이런 거 했어. 잘했지?'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이런 결정례가 2009년 227건에서 줄어들기 시작해 2011년 91건 2013년 97건, 2014년 75건으로 1/3로 급감했다.


이쯤되면 자진해서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여전히 현 위원장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인권위를 바라보는 권력의 눈빛이 노골적인데다, 독립성을 사수하기 위해 결기를 보여야 할 위원장마저 저 모양이라면 인권위의 앞날은 뻔하다. 설령 현 위원장이 그만 두고, 새로운 사람이 임명된다고 한들 무엇이 달리지겠는가? 정권은 짧고 인권은 길다고 했던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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