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고흐와 김홍도의 그림에서 발견한 인권, '사람이 사는 미술관'을 읽다

너의길을가라 2024. 9. 2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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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 관한 책은 많다. 읽기가 부담스러운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책에서 읽기 수월한 대중적인 책까지 다양한 편이다. '미술'에 대한 책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해박한 전공자부터 여러 분야의 전문가, 유명 도슨트 등이 이해하기 쉽게 쓴 미술 서적도 많다. 다양한 주제와 관점으로 접근해서 독자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인권과 미술,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은 책은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박민경의 '사람이 사는 미술관(그래도 봄)'은 새로운 발견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에서 조사관 및 행정 외에 인권 교육 운영 업무를 15년 넘게 해온 베테랑 전문가이다. 그는 인권위에서 근무하며 쌓은 경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기본 권리를 '여성', '노동', '차별과 혐오', '국가', '존엄' 다섯 가지 주제로 풀어 접근한다.

"시대의 부조리를 포착한 어떤 그림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상황을 변화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의 인권은 한 단계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합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의 권리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 세계의 명화들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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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만 보면 묵직하게 다가와 덜컥 겁이 나지만, 그림을 매개로 내용을 쉽게 풀어내다보니 글이 술술 읽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저자는 폴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에서 죽음의 순간조차도 여자다워야 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하며, 항공사 승무원들에게 외모, 옷차림, 여성스러운 서비스를 요구하는 대한민국 항공사의 부당함을 연결짓는다.

또, 집안일은 돌보지 않고 글쓰기에 몰두한 여성을 그린 오노레 도미에의 <블루스타킹>에서 프랑스 사회의 위선과 부조리를 풍자했던 화가가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역차별 논란에 대해서는 이상적인 여성 대법관의 수를 9명 중 9명이라 답하면 놀라지만, 1981년까지 대법관이 모두 남자였다는 긴즈버그 대법관의 말을 인용해서 품위있게 응수한다.

고흐의 <정오의 휴식>에서 '노동자의 휴식'에 대해 언급하며,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면 휴식할 수 있는 권리도 노동자 스스로 죄책감 없이 주장할 수 있어야(p. 72)"한다고 주장한다. 젠틸레 다파브리아노의 <이집트로의 피신>라는 성화를 통해 예수님도 난민이었다며, 난민 문제에 좀더 열린 태도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대목은 흥미롭고 신선하다.

김홍도의 <서당>에서 학교에서의 체벌 금지 이슈를 끄집어 내서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고 강조하거나, 툴루즈 로트레크의 <질병 검사>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확보하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미술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어릴 적 아버지가 새해가 될 때마다 방에 걸어준 달력 속 서양의 명화를 보며 미술에 대한 관심을 품었다는 저자는 인권위에서 일한 후 프랑스 파리 여행을 할 때 "그림에서 인권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속 절규하는 인물들은 세월호의 기억나게 했고, 들라크루아가 그린 <키오스 섬의 학살>을 보면서 제주 4 •3 사건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권이라는 어렵고 딱딱한 주제를 쉽게 전달해주니 독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마운 직업병이다. '우리는 순수한 것을 생각했다'를 쓴 르포작가 은유의 추천사처럼, "혐오와 분노와 차별 같은 사나운 마음은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인권의 눈으로 그림을 보고, 읽고, 생각하는 책 '사람이 사는 미술관'은 최고의 인권 교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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