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박람기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 라울 뒤피와 김환기를 발견하다

너의길을가라 2015. 2. 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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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2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을 다녀왔다. 지난해(2014년) 9월 2일 <20세기, 위대한 화가들 展>을 보러 들른 지 약 5개월 만이다. (<20세기, 위대한 화가들 展>, 키스 반 동겐을 발견하다) 당시에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선택의 패러독스에 걸릴 만큼 마음에 드는 전시가 많았다.


(지금이야 끝났지만) 전시 기간을 생각한다면 <모네, 부댕, 쿠르베, 터너, 뒤피...인상파의 고향, 노르망디>를 고르는 것이 맞았겠지만, 선택권은 함께 간 (미술관이 처음인)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물론 '동전 던지기'라는 어이없는(?) 방법으로 결정됐지만. 


어느 것을 고를까요? 알아맞춰 봅시다!



<블라디미르 쿠쉬전>은 또 다른 지인과 함께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프랑스 장식예술박물관 특별전>은 '그림'이 아닌 관계로 제외했다. 좁은 의미의 미술관을 경험하는 것이 (그 친구의) 목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동전 던지기'의 결과는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였다.


인상파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지역 중 하나인 노르망디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모네, 부댕, 쿠르베, 코로, 터너, 라울 뒤피 등 여러 화가들이 그려낸 작품들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좋았겠지만,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나 역시 마찬가지)한 친구에게는 18세기 말 고전주의부터 현대 추상 표현주의까지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오히려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동전 던지기'는 현명하고도 절묘했다.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는 반즈컬렉션(Barnes Foundation collection)과 함께 미국의 양대 컬렉션을 형성하고 있는 필립스컬렉션(The Phillips collection)을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반즈든 필립스든 미술 애호가들에겐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그다지 솔깃한 이야기는 아니다.


무엇보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입체주의, 현대 추상 표현주의를 아우르는 서양미술사의 후반부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런 포괄적인 전시에서는 다양한 미술형식과 수많은(68인) 화가들의 작품들을 차례차례 보면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동시에 내 취향이 무엇인지 캐치할 수 있다. 물론 겉핥기식 감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균형을 맞춰가는 건 각자의 몫이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술관에서 공들여 들여와 '짜잔'하고 들이미는 메인 화가들의 작품보다는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물론 그들도 엄청나게 유명한 화가들이겠지만 내 입장에서) 화가들이나 처음 보는 생소한 작품들에 꽂힐 때가 많다. <20세기, 위대한 화가들 展>에서도 키스 반 동겐에 매료됐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인상 깊었던 작품들을 찾을 수 있는 선에서 옮겨봤다.


- 어니스트 로슨, 「폭풍우 가까이」, 캔버스에 유채, 62.9 x 76.2cm, 1919~1920 -


- 베르트 모리조, 「두 소녀」, 캔버스에 유채, 1894 -


- 모리스 프랜더개스트, 「나무 아래에서」, 60.6 x 80cm, 1913~1915 - 


"나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추한 것을 지우도록 되어 있다."

-라울 뒤피-


- 라울 뒤피, 「화가의 아틀리에」 -


최근에 읽었던 이택광의 『인상파, 파리를 그리다』에서 아두아르 마네와 모리조, 사제 관계이면서 동료이고 또는 그 이상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은 터라 모리조의 「두 소녀」라는 작품에 더욱 눈길이 갔다. 그림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문득 모리조를 '마네의 여인'이라는 타이틀로 국한해서 언급하는 것은 모리조라는 화가에 대한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그림이었다.


유명한 미술품 컬렉터인 거트루드 스테인은 "뒤피는 즐거움이다"라고 평가했는데,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경쾌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이 마음이 밝고 즐거워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뒤피는 밝고 화사한 색채로 '빛과 색의 축제'를 표현하고자 했고, 그러한 생각들이 그의 작품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혹시 마음이 울쩍하거나 기분이 다운된다면, 뒤피의 그림을 검색해서 찾아보길 권한다.


-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전시의 후반부에서 흥미로운 이름을 발견했다. 서양미술을 전시한 공간에서 '김환기'라는 대한민국 화가의 이름을 만난 것이다. 무엇보다 작품이 압도적이었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따온「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의 작품은 고국을 떠나 뉴욕에서 지내던 화가가 자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투영한 것이라 한다. 하나 찍고 친구를 떠올리고, 점 하나 찍고 고국을 생각했다고 할 만큼 절절한 작품이다.


함께 갔던 그 친구는 미술관을 찾은 것에 매우 만족했다. 부러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재차 유심히 확인해봤지만, 실제로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즐겼던 것 같았다. 주변에도 미술관 하면 '거부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상한 척 한다고 비아냥대기도 하고, '간지럽다'면서 그런 데(?) 안 간다고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무엇이든 첫걸음이 힘든 것 아니겠는가?


실제로 가보면 알 수 있겠지만, 미술관 그거 별 거 아니다. 대단한 고상을 떠는 곳도 아니고, 특별히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만 찾는 곳도 아니다. 나처럼 아는 건 쥐뿔도 없는 사람도 찾을 수 있는 곳이고, 미술이라는 것 자체가 낯설고 어색한 내 친구도 빠져들 수 있는 공간이다. 삶에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면, 뻔한 데이트 공간이 지겹다면, 미술관을 한 번쯤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P.S. (1) <앵그르에서 칸딘스키까지>는 3월 12일까지이고, 관람료는 15,000원이다.

P.S. (2) 아래는 전시장에서 훔쳐온 말들이다.


선을 그어라. 많은 선을 그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실물을 보고 그려도 좋고, 기억으로 그려도 좋다. -앵그르-


인간의 영혼, 특히 동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표현하는 것만이 나의 관심사다. 그것이 없다면 그림은 아무것도 아니다. -에두아르 마네-


색채는 건반, 눈은 현을 두드리는 망치, 영혼은 현이 있는 피아노이다. 예술가는 영혼의 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건반 하나하나를 누르는 손이다. -칸딘스키-


나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바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지아 오키프-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작품에 어떠한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마크 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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