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못 하겠어 이거!"

"파일럿만 합시다"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탐험대는 목표였던 10km를 훌쩍 넘어 17km를 걸었다. 스태프 없이 오로지 멤버들끼리 서로를 의지한 채 이뤄낸 성과였다. 또한, 맥주 한 잔을 위한 고된 여정이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조세호와 배정남은 더 이상 못하겠다며 털썩 주저 앉았다. 이해가 됐다. 그들은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 돌산을 넘는 루트를 선택했고, 그만큼 몸은 고되고 지칠 수밖에 없었다. 



완만한 길을 선택했어도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가파른 돌산을 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지진희는 "평생 보지 못할 걸 보면서 왔어"라며 감격스러워 했지만, 그건 모험에 특화된 대장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조세호는 "어두워지니까 약간 공포감이 엄습해 오더라고요"라며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사막은 그런 곳이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곳, 그래서 언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런 곳 말이다.


이제 마지막 일정만 남았다. 남은 거리는 약 3.83km뿐이었다. KBS2 <거기가 어딘데??>의 사막 탐험대는 대망의 하이라이트를 위해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태양이 그 포악함을 드러내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곧 푸른 색으로 빛나는 아라비아 해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이 탐험대를 설레게 만들었다. 돌산을 넘으면서 살며시 보였던 바다가 곧 눈앞에 펼쳐질 것만 같았다. 이번에는 신기루가 아니었다. 


탐험대는 바다로 가는 길목에서 굽이치는 모래 언덕을 마주했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진짜 사막'을 만난 것이다. 멤버들은 지금까지 걸었던 사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아라비아 사막을 바라보며 감상에 잠긴다. "진짜 사막은 이런 거구나!"라며 감탄사를 터트리며 저마자의 방식으로 사막을 즐긴다. 사막의 풍경을 카메라에 남고, 사막을 배경 삼아 셀카도 남긴다. 지진희가 긴장감을 불어넣지만, 멤버들은 이내 썰매타령에 빠져 버렸다.



"지금 굉장히 여유가 있는데, 이 능선을 넘어와서 저 앞쪽을 보면 그 여유가 사라질 거야. 그래, 충분히 만끽하고 올라와라."


대원들이 사막의 낭만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대장은 현실을 바라본다. 늘 그렇듯 매번 앞서 있던 지진희는 냉정을 되찾았다. 눈앞에 끝없는 슈거 둔스(sugar dunes)가 탐험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막이 황색 모래로 형성된 것과 달리, 오만의 사막에는 흰색 모래로만 차 있는 사막지대가 있다. 이 곳의 모래가 흰색을 띠는 까닭은 석영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란다. 


문제는 이 슈거 둔스를 앞두고 탐험대의 체력이 완전히 소진됐다는 것이다. 누적된 피로 때문이다. 나무 덩굴 아래에서 퍼져버린 멤버들은 시간이 지나도 움직일 줄을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가야 하는데.. 이렇게 처져서 어떡하죠?" 대장 지진희는 걱정이 앞선다. 멤버들은 그 후로 한참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에야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과연 그들은 자신들의 도전을 완성할 수 있을까?



"사막을 여행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막 한가운데 섰을 때 인간의 시선이나 생각을 가로막는 인위적인 장애물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막에서 인간의 명상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간은 절대적인 나약함 속에서 절대 자연의 무한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만 듭니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p.262 


<거기가 어딘데??>는 '사막'이라는 미지의 공간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리더인 지진희를 필두로 차태현과 조세호, 배정남은 사막을 직접 걸으면서 그곳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사막의 공기는 우리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답답함에 적응해야만 했다. 쉼없이 내려쬐는 태양은 공포스러웠고,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 그늘에 의존해야 했다. 탈진과 탈수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은 멤버들을 압박해 왔다. 차태현은 자신이 겪었던 공황 증세와 사막에서 느끼는 고통이 비슷하다고 말했고, 다른 멤버들 역시 광활할 사막 한가운데에서 불안 증세를 느꼈다. 사막 탐험대가 그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역시 '사람'이었다. 리더 지진희의 힘은 무엇보다 컸다.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결단력으로 탐험대를 이끌었고, 한걸음씩 앞서서 멤버들을 독려했다.


또, 조세호의 활약도 돋보였다. 조세호는 탐험대에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리더인 지진희를 엄마처럼 따르고, 지쳐있는 배정남과 발걸음을 맞추며 독려했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책임졌는데, 자칫 다큐로만 흐를 수 있었던 프로그램에 예능적 재미를 이끌어 냈다. 탐험대를 위해 식사 준비에 매진하는 등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준 배정남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사막의 삶은 힘들고 '도움'은 누구든지 필요합니다."


<거기가 어딘데??>는 '함께'라는 가치를 또렷히 보여줬다. 그들은 함께였기에 사막을 걸을 수 있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베두인들은 사막에서 낯선 이방인을 만나더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고 한다.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묻고, 무엇이든 도움을 주고자 한다.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그들만의 전통이자 생존법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도 '사막'과 매한가지 아닐까. 물론 참혹한 경쟁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네 삶과 베두인들의 삶이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서로에게 다가간다면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 당도한 탐험대의 모습이 감동스러웠던 건, 아마도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걷는다는 동질감을 가졌기 때문이리라. '함께'는 참으로 옳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나는 얼굴이 이렇게 피부가 약해가지고 타. 나는 먼저 서울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피부과 예약해서.."


베를린에서 출발해 프라하로 달려가는 기차. 꽃할배들은 기차간의 중간 즈음에 두런두런 모여 앉았다. 이동 시간만 4시간이나 걸리는 장거리 일정이지만, 그들에겐 잠깐이라도 지루할 틈이 없다. tvN <꽃보다 할배 리턴즈>에서 새롭게 합류한 멤버 김용건 덕분이다. '건건'으로 통하는 김용건은 어김없이 농담 본능과 수다 본능을 뽐낸다. 꽃할배 가운데 막내인 그는 특유의 에너지로 주변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배우 이름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박근형의 해결사도 역시 김용건이었다. '유명한 (여)배우', '60대 중반'이라는 두 가지 힌트만으로도 그가 윤미라라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해 낸다. 한번 발동된 본능은 멈출 줄은 모르는데, 김용건은 함께 낚시를 다녔던 이야기, 대만영화제에 참석해 유명한 배우들을 만났던 이야기 등 에피소드를 끝없이 쏟아낸다. "아주 좋으네요. 두런두런 옛날 이야기 하고 좋잖아요." 


박근형이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고 말하자, 김용건은 "조금 서두르자고 얘기할까요? 형님 또 급하시면.. 전화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장난기를 발휘한다. 마침 기차가 다시 출발하자 "가네! 가네! 애들 벌써 또 아네"라며 너스레를 떤다. 기차간은 다시 웃음꽃이 피어 오르고, 그 즐거운 향기는 공간을 가득 채운다. 김용건 덕분에 4시간의 이동시간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자기 빠지고 우리 넷이 왔으면 얘기도 안 하고 잠만 자고 올 거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꽃보다 할배>의 지난 시즌에서 '침묵'이 얼마나 긴 시간을 차지했었는지 말이다. 남자들의 대화라는 게 원래 빈약하고 파편적일진데, 우리의 할배들이라고 다를까. 모든 것이 낯설었던 첫 시즌은 어색함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시즌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이동 시간은 조용하고 지루했다. 그저 졸음만 쏟아지는 괴로운 시간이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김용건의 등장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 한 사람의 존재감과 역할이 이렇게 중요하고 클 수 있을까. <꽃보다 할배 리턴즈>에서 김용건의 존재감은 단연 빛난다. 물론 새로운 멤버는 주목받기 마련이고, 그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건건'의 활약상은 돋보인다. MBC <나 혼자 산다>를 통해 드러났던 예능감, 언제나 '청춘'이었던 그의 감각과 에너지는 진짜배기였다. 



"제가 지금 82kg 정도 나가요. 입술을 좀 빼야 돼. 입술이 한 20kg 나가니까." 


그는 할배들의 막내로서 제몫을 다 할 뿐 아니라 '물 한 잔도 그냥 따르지 않는 프로 농담꾼'으로서 자신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프라하에서 할배들끼리의 아침 식사 시간, 근형과 함께 근처의 카페에 들른 김용건은 시종일관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이서진이 없어) 부담스럽기만 한 주문이 끝나자 어색함을 날리기 위해 또 다시 수다 삼매경이다. 


<꽃보다 할배>의 열혈 시청자였던 김용건의 합류로 '꽃할배'는 또 다른 완전체가 된 듯 하다. OB(이순재, 신구와 그들을 보좌하는 이서진)와 YB(박근형, 백일섭, 김용건)로 자연스럽게 구분이 되면서 전체적인 짜임새가 생겼다. 김용건은 이서진이 부재할 때마다 형들을 살뜰히 챙기며 짐꾼의 부담감을 덜어줬다. 무엇보다 그의 활기넘치는 에너지가 여행(과 일행들)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이제 김용건의 농담은 <꽃보다 할배 리턴즈>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김용건의 수다는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요소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다른 꽃할배들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활력소가 됐다. 그렇게 되자 꽃할배 간의 케미가 더욱 활발해졌고, 당연히 꽃할배들 개개인의 매력도 더욱 살아나게 됐다. 김용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해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우리는 이미 김용건의 수다와 농담의 치명적 매력에 중독됐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논란과 시청률은 정비례하는 것일까. 언뜻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의아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병헌 캐스팅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작했던 tvN <미스터 션샤인> 첫 회는 시청률 8.852%(닐슨코리아 유료가구플랫폼 기준)를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케이블 드라마 중 첫 회 기준 시청률 1위 기록이다. tvN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이하 <도깨비>)의 기록(6.322%)을 갈아치운 것이다. 김은숙이 김은숙을 경신한 셈이다. 


2회 시청률은 더 올랐다. 9.691%, 3회만에 시청률 10%의 벽을 넘어설 기세다. (참고로 <도깨비>도 3회만에 시청률 10%를 넘어섰다. 정확한 수치는 12.471%.) <미스터 션샤인> 1, 2회는 24부작의 긴 호흡을 담아낼 차분한 밑그림과도 같았다.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 일제강점기 직전의 격변기를 그리는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미스터 션샤인>은 흔들리고 부서지면서도 엄중한 사명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유쾌하고 애달픈, 통쾌하고 묵직한 항일투쟁사다."


유진 초이(이병헌), 고애신(김태리), 쿠도 히나(김민정). 1, 2회에 도드라졌던 3명의 인물을 통해 <미스터 션샤인>이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뚜렷해졌다. 김은숙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이야기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이름 없는 영웅들의 항일투쟁사.' 여기에 이들과 얽키고설킬 구동매(유연석)와 김희성(변요한)까지, 저물어 가는 조선을 지켰던 아무개들의 활약. 구한말 의병(義兵), 그것이 김은숙이 구현한 새로운 '김은숙 월드'였다. 


각각의 인물들은 더할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김은숙은 인물들의 서사를 쌓아올리는데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 선택은 과감했지만, 탄탄히 쌓인 캐릭터는 곧바로 힘을 발휘할 것이다. 1회에선 노비로 태어나 억울하게 부모를 잃은 유진의 유년기와 성장기가 그려졌다. "내 조국은 미국이야. 조선은, 단 한 번도 날 가져 본 적이 없거든."라는 오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를 <미스터 션샤인>은 납득시켰다.



2회에서는 단숨에 애신에게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의병이었던 부모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애신은 사회적 금기와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바깥세상에 눈과 귀를 기울인다. 당시를 살아가던 여성에겐 감히 허락되지 않았던 일이다. 그럼에도 애신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끝내 '총'을 손에 쥔다. 거듭 만류하던 할아버지도 그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조선 제일의 총잡이 장승구를 소개해 스승으로 모시게 한다.


스쳐 지나가듯 그려졌던 구동매와 김희성과 달리 쿠도 히나의 캐릭터는 또렷히 드러났다. 친일파 아버지 이완익(김의성)의 딸이자 글로리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그는 남자 손님에게 희롱당하는 종업원을 구한 후 이렇게 말한다. "그깟 잔이야 다시 사면 그만, 나는 네가 더 귀하단다. 그러니 앞으로 누구든 너를 해하려하면 울지 말고 물기를 택하렴." 강인하면서도 지혜로운 여성 캐릭터의 등장이다.


이렇듯 찬란한 주제의식과 매력적인 캐릭터, 내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미스터 션샤인>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연기로는 깔 수가 없다'는 이병헌은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눈빛과 분위기로 카메라를 압도한다. 충무로의 샛별로 떠오른 김태리는 귀품있는 연기와 완벽한 딕션으로 시청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김태리는 오랜 경력의 이병헌에 결코 밀리지 않는 강단을 보여줬다. 문제는 '러브'를 나눠야 할 두 사람의 케미다.



유진과 애신이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는 2회 엔딩은 김은숙 작가의 히든카드와도 같았다. 마치 <도깨비>에서 위기에 빠진 지은탁을 구하기 위해 김신(공유)와 저승사자(이동욱)가 안개를 뚫고 등장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공교롭게도 그 장면도 2회 엔딩이었는데, 강렬하고 상징적인 장면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김은숙만의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물론 많은 시청자들이 손으로 상대방의 코와 입을 가리고 서로의 눈매를 확인하는 두 사람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일각에선 '잃어버린 딸을 찾는 아빠의 모습같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20살 차이'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다. 게다가 이병헌은 성 관련 추문의 주인공이니, 이 로맨스를 마냥 곱게 볼 수 있겠는가. 각각의 연기는 훌륭하고 흡인력이 넘쳤지만, 이들이 뭉쳤을 때 주는 위화감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보였다. 


또, 고증에 대한 문제도 제기됐다. 유진이 신미양요(1871년) 직후 미국인을 만나 미국으로 건너가는 설정은 미국인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1885년)를 고려하면 잘못된 것이고, 김태리가 사용한 연발총은 일본군이 사용했던 것이라는 지적이다. 고증에 대한 지적이 까다롭다 여길 수 있겠지만, 우리의 역사를 다루는 일에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자는 주장을 그냥 넘기긴 어려운 일이다. 



김은숙은 달라졌는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애신과 쿠도 히나를 전면에 배치한 건 의미있는 변화다. <태양의 후예>에서 보여줬던 여성상의 연장이라 볼 수 있겠지만,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종속적인 여성상을 그리는 지루함을 답습하지 않았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다만, 그들이 유진을 놓고 삼각관계를 벌이게 될 때, 오로지 사랑만을 갈구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뻔한 여성상으로 전락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어찌됐든 간에 김은숙은 구한말이라는 숨겨진 시간을 도려내 시청자들 앞에 꺼내 놓았다. 이름 없는 의병들의 숭고한 역사를 발굴했다. 또, 김은숙은 자신의 영역과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로맨스라는 자신의 장점을 활용하는 동시에 새로운 장르와 이야기를 통해 시청자와 교감에 나서고 있다. 그래서 김은숙은 달라졌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아직까진 반반이겠지만 말이다. 


2회까지의 <미스터 션샤인>은 김태리(를 비롯한 배우들)의 하드캐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김은숙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독보적 재능이 '영화 같은 드라마'를 시청자들에게 선사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 즐거움 못지 않게 스트레스도 주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가 단순한 재미를 넘어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통찰을 이루었을지 지켜볼 일이다. 설령 그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김은숙은 김은숙일 테지만.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온갖 자극적인 조미료로 점철된 음식만 먹다가 재료의 맛을 그대로 살린 신선하고 청정한 음식을 섭취한 느낌이라고 할까. 오랜만에 시청했던 JTBC <김제동의 톡투유2 - 행복한가요 그대>(이하 <톡투유2>)가 주는 감동을 표현하자면 그리 설명할 수밖에 없다. 거기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고, 위로와 소통이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 앞에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없다. 오로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실제로 (이름은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시청자들의 고민을 과장 · 왜곡해서 되팔아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는 프로그램과 연예인을 초대해서 신변잡기 · 스캔들 · 말장난으로 일관해 억지 웃음을 유발하는 프로그램들이 수두룩하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도 피폐해지는 일이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갉아먹기를 지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가고 있다. 


<톡투유2>는 그런 흐름에 '저항'하고 있는 사실상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특별한 연출이 개입되지도 않고, 사연을 과장해 들려줄 작가의 불필요한 섬세함이 요구되지도 않는다. 그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서로의 상황과 사연에 공감하고, 진심을 담은 위로를 건넬 뿐이다. 이 간단한 작업만으로도 한 편의 방송이 완성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중심에는 김제동이라는 걸출한 MC가 있다. 그는 '토크 콘서트'라는 콘셉트를 가장 완벽히 이해하는 최고의 MC다. 김제동은 오랜 기간 단련된 순발력을 통해 청중들과 즉각적으로 교감한다. 수백 명의 청중들을 쥐락펴락하며,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그 어떤 이야기에도 어김없이 가장 적절한 반응으로 대응한다. 


<톡투유2>가 '당신의 이야기가 행복입니다'라는 명확한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청중과의 소통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힘은 오로지 김제동에게서 나온다. 그만큼 <톡투유2> 내에서 김제동의 역할과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단순히 말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저력은 경청, 즉 이청득심(以聽得心)에 있다. <톡투유2>에 있어서 만큼은 김제동 이외의 다른 MC를 상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든든한 김제동이 있기 때문일까. <톡투유2>만의 맑고 깨끗한 에너지가 전달되기 때문일까. 지난 10일 방송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류수영은 긴장한 기색도 없이 청중과의 토크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 머치 토커'의 면모를 과시했는데, 패널로 참여한 정재찬 교수는 "오늘 녹화가 힘들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고, 김제동은 "멋있긴 한데 지치는 스타일인 것 같다"며 웃음을 이끌어냈다. 



"세상을 망치는 건 부끄러움을 너무 안 타는 어른들이라고 생각해요. 부끄러움을 타는 건 부끄러워할 수는 있지만, 창피해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류수영은 사람들과 말하는 게 부끄럽고 어렵다며 울먹이며 고민을 털어놓는 청중에게 '부끄러운 걸 부끄러워하는 건 괜찮다'고 위로하면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 부끄러운 사람들이 만드는 배려라고 생각해요"라 덧붙였다. 물론 앞서 청중들을 활짝 웃게 만들었던 강릉 소녀들도 활약도 빼놓을 수 없었다. 청중과 게스트, 청중과 청중들 간의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는 장면이야말로 <톡투유2>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유리를 대신해 일일MC로 참여한 청하와 제이 래빗(J Rabbit)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끄러움이 많다는 청중을 위로했고, 이어서 패널 정재찬 교수도 동참했다. 그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 되게 부끄러움이 많아요"라고 웃음을 자아내더니 자신도 방송 출연을 머뭇거리고 망설였는데, 그 즈음에 자신의 스승이 보낸 편지에 용기를 얻어 방송에 나오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잘하고 못하고의 뒷말은 늘 있는 법입니다. 한 일이 없으면 칭찬이건 비난이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성한 뒷말이야말로 그 사람이 살았던 증거일 것이다. 우리 한 세상 왔다 가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우아함만을 지니고 살다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의 사연을 수많은 사람들이 경청하고 공감한다. 자연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교감과 소통 속에 따뜻한 위로와 진심 담긴 응원이 전달된다. 사연을 이야기한 청중은 얼마나 큰 위로를 얻어갔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는 또 얼마나 큰 위안을 얻었던가. 문득 <톡투유2>는 우리에게 숨구멍과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치고 피곤한 현대인들이 잠시나마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는 공간처럼 말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지금 뭐하자는 거야! 박 판사, 당신, 지금 판사 된 지 몇 달 됐어. 이런 거 쓸 정도로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해?"


JTBC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고아라)은 결국 사직서를 내밀었다. NJ그룹의 사위인 주 교수에게 준강간을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했지만, 주 교수가 재판장에서 쓰려지고 구치소에서 목을 매자(자살 미수) 혼란스러워졌다. 게다가 항소심에서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 억울한 피해자가 나왔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게 됐다. 책임을 져야할 것 같았다. 



"책임? 어디서 건방진 소리야. 지금까지 재판 당신 혼자 했어? 재판장인 나하고 임판사는 뭐야, 허수아비야? 아직 재판 안 끝났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다음 주에 선고 있을 판결 초고나 빨리 가져와. 엉뚱한 데 신경쓰느라고 자기 일 소홀했다가는 내가 먼저 그만두게 만들거야. 나가서 일해."


민사 44부의 부장 판사 한세상(성동일)은 그런 후배의 모습을 그냥 지켜보지 않았다. 한세상은 특유의 버럭으로 얼이 빠져 있는 박차오름을 다그친다. 사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그를 돌려 보낸다. 그러나 법원 안팎의 분위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박차오름을 향한 세상의 질타는 더욱 거세졌다. '남성 혐오'라는 낙인이 찍힌 박차오름은 '미스 함무라비'에서 다시 '튀는 여자 판사'가 됐다. 사람들은 박차오름을 잔다르크로 만들려고 했다. 


한세상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과녁이 되고 싶지 않은 법원은 내부에서 희생자를 찾아내기 급급했고, 그 손쉬운 색출 작업은 미운털이 박혔던 박차오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민들은 법원 앞에 진을 치고 '남자잡는 판사 물러가라', '살인 판사 물러가라'고 연일 소리쳤다. 한세상은 스스로 막말 판사가 됨으로써 후배의 짐을 나눠지고자 한다. 법정 내에서 그의 과한 폭언은 계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달라져야 할 때인 거 같다. 박 판사가 그런 선의를 베풀었는데 외롭게 두면 쓰겠냐. 쏟아지는 비를 멈출 수 없으면 함께 맞아야지"


하지만 결국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박차오름에게 출석 통보가 내려졌다.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그러나 선의는 그 행위자를 배신하지 않는 법이었다. 먼저 동료들이 움직였다. 임바른(김명수)과 정보왕(류덕환)은 '나부터 징계하라!'는 내용의 서명을 돌렸다. 1인 시위 할머니와 인터넷 매체의 기자가 된 증인 김다인 등의 연대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세상이 나섰다.  


"부끄럽지도 않소? 후배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조직을 위한다는 핑계로 이 젊은 후배들을 희생시켜? 당신은, 당신은 뭘 희생했어? 그렇게 사법부를 위한다면서 그 잘난 선배들은 뭘 희생했냐고! 높은 곳에 우아하게 앉아서 점잖은 척만 하면 다요? 점잖은 척만 하면 그게 다냐고!"


내일이라도 당장 징계위원회를 열지 그랬냐며 시건방을 떠는 성공충(차분배)을 구내 식당에서 만난 한세상은 그의 멱살을 잡고 "야, 이 자식아! 선배로서 그게 후배들한테 할 짓이야?"라고 분노했다. 또, 자리를 보전한 채 희생양만을 찾아다니는 수석부장(안내상)을 향해 부끄럽지도 않냐고 소리친다. 정말이지 속이 시원해지는 일갈이었고, 선배의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미스 함무라비>의 초반만 해도 한세상은 '꼰대'의 이미지가 강했다. 박차오름의 출근 복장을 제재했고, 직장이나 술자리에서 성차별적 언어를 남발했다. 그가 여러 면에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한계가 뚜렷해 보이는 아저씨였다. 하지만 젊은 후배들과 함께 부딪치며 일을 하면서 한세상은 조금씩 변해갔다. 초임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며 각성하기도 했다. 


한세상은 선배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후배들을 위해 바른 말을 할 줄 알았고, 스스로 총대를 메고 앞장설 줄도 알았다. 부당한 일에 저항했고,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줄 알았다. 어린 후배들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무작정 따르라 강요하지도 않았다. 또, 부끄러운 선배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날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통쾌했다. 


문득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에겐 그런 선배가 있는가. 아니, 질문을 달리하게 됐다. 나는 후배들에게 한세상 같은 선배인가. 답은 더욱 궁색해졌다. 어쩌면 우리는 성공충 같은 선배이거나 수석 부장 같은 선배는 아니었을까. <미스 함무라비>가 던지는 질문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통쾌함 뒤에 남는 씁쓸함을 지우기 위해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컨베이어 벨트를 반대로 엉금엉금 기어 통과한 후 셔터문 옆의 상승 버튼을 누르자 셔터가 올라간다. 무려 9시간 만에 바깥 공기를 맡은 대탈출러들, 강호동, 김종민, 신동, 유쟁배, 김동현, 피오는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환호성을 지른다. 제작진은 축포를 터뜨려 그들을 노고를 치하하며 반갑게 맞이한다. 사설 도박장을 배경으로 꾸려졌던 tvN <대탈출> 첫 번째 에피스도가 끝이 났다. 


탈출을 자축하며 기뻐하는 저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허전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근데, 이걸 왜 보고 있어야 하지?" 의문으로 가득한 초대형 밀실에 갇힌 출연자들은 탈출을 위해 주변을 탐색한다. 단서를 모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탈출을 궁리한다. 또,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은다. 그러니까 이건 명백히 '방탈출 게임'이다. 다시 말하면 시청자들은 '방탈출 게임'을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뭐든 방송의 소재가 되는 세상인데, 방탈출 게임을 예능으로 만드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문제는 그것이 '저들만의' 방탈출 게임이란 사실이다. 시청자는 '관객'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슨 일이 벌어지나 지켜본다.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를 '관망'이라 하긴 어렵다. 시청자는 상황에 몰입하고, 캐릭터에 감정이입한다. 이를 교감 혹은 소통이라 불러도 좋다. 그래서 TV는 일견 일방향적 같지만, 결과적으로 쌍방향적인 매체다. 



다시 <대탈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대탈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시청자를 '관망자'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선, 맥락이 없다. 도대체 저들은 왜 밀실에 갇힌 걸까. 저들은 무엇 때문에 밀실에서 탈출해야 하는가. 저들이 밀실을 탈출함으로써 얻는 이들은 뭘까. 다시 말해서 <대탈출>에는 원인도 없고, 동기도 없다. 몰입할 만한 요소가 없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든 간에 시청자들의 반응은 시들시들할 수밖에 없다.


또, 개입의 여지가 없다. 신동 혼자서 부단히 암호를 풀고, 분산돼 있는 단서를 조합해 비밀번호를 찾아내는 동안 시청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예능의 문법'을 버리지 못한 강호동이 치킨 타령을 하고, 지분율을 따지며 멤버들을 구박하는 장면을 멍하니 쳐다보며 너털웃음이나 지을 뿐이다. 과연 이것이 <대탈출>이 의도한 것이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퇴보다. 정종선 PD는 기자간담회에서 "제작비는 엄청 많이 들었다. 했던 스튜디오에서 계속 진행할 수 없지 않나.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썼다"며 기대감을 높였지만, 도대체 그 많은 제작비를 왜 쓴 건지 의문이 들었다. 전작들인 <더 지니어스>, <소사이어티 게임> 시리즈에 비해 <대탈출>은 목표 의식도 없고, 긴장감은 더욱 없었다. 


<더 지니어스>의 박터지는 두뇌 대결과 눈치 싸움은 얼마나 짜릿했던가. 의리와 배신, 연합과 반목은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소사이어티 게임>의 절박함과 승부욕은 또 어떠했던가. 거기엔 상금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연예인과 비연예인을 아우르는 캐스팅이 있었다. 절박함이 없는 <대탈출>에 남은 건 다분히 예능적인 웃음뿐이다. 


<대탈출>을 마주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탈출하거나 말거나'에 가깝다. 저들의 탈출이 9시간이 걸리든 19시간이 걸리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상황에 빠져들 만큼 스토리텔링이 잘 돼 있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이입할 대상도 보이지 않는다. 돌려막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식상한 얼굴들이라 솔직히 지겹기까지 하다. 그마저도 출연자 전원인 남성이다. 여러모로 안이한 <대탈출>, 대단히 실망스럽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던 '꽃할배'들에게 베를린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됐던 시절에 미군 관할 검문소였던 체크 포인트 찰리, 베를린 장벽 공원인 월 메모리얼 파크를 둘러보는 꽃할배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역사의 현장을 걷는 삶이 역사인 이들의 발걸음이 묵직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꽃할배들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곤히 잠을 잤던 꽃할배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아침을 맞이한다. 열정 가득한 이순재는 밤늦게까지 씨름했던 대본을 다시 손에 쥔다. 신구는 청바지를 입더니 "너무 애들 옷 같지 않아?"라며 이서진에게 검사를 맡는다. 김용건은 어김없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고, 박근형은 그런 동생의 말에 추임새를 넣는다. 


그런데 웬일인지 백일섭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이른 시간부터 가방 정리에 여념이 없다. '건건'의 수다에 웃음을 짓다가도 다시 짐정리에 매진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꽃할배들이 식당에 하나 둘 모여 식사를 시작한다. 식탁 위에는 웃음꽃이 피고, 분주한 대화 속에 식사가 마무리돼 간다. 영원한 짐꾼 이서진은 오늘 출발 시각은 오전 10시라고 브리핑한다. 백일섭은 조용히 밥을 다 먹은 후 과감히 선언한다. 


"오늘 나는 아홉 시 반에 출발할 거야. 찬찬히 가면서 커피도 한잔 먹고, 맨날 뒤따라 가니까.."



그 말을 듣고나자 백일섭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 동시에 왠지 모를 짠함이 몰려왔다. 다리가 불편한 백일섭은 걸음걸이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맨끝에 뒤처져 걸었다. 6년 전에 떠났던 첫 여행 때부터 그랬다. 직진 순재는 저만치 앞서나가서 보이지도 않았고, 신구와 박근형은 중간 즈음에서 걸어갔다. 이 순서는 마치 <꽃보다 할배>의 공식과도 같았다. 


백일섭은 매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느린 걸음으로 따라가느라 바빴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 백일섭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민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몸이 그리 좋지 않으면 스스로 출연을 고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쓴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백일섭도 그런 시선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라고 왜 다른 일행들에게 미안하지 않았겠는가. 매번 자신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갔던 길을 되돌아 오는 형들에게 왜 미안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백일섭은 다른 이들보다 30분 먼저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뒤처지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여행을 함으로써 다른 일행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여섯 명이 합심해서 다니는 게 (호흡이) 맞아야지. 내 자신한테도 지면 안 된다."


그것이 백일섭의 최선이었고, 또 배려였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백일섭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면서 말이다. 혼자 먼저 나와서 느긋하게 걸을 수 있게 되자 백일섭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내 속도로는 잘 걸어. 여행이라는 게 이렇게 천천히 가면서 쉬엄쉬엄 가는 거지. 막 바빠, 다들." 그렇다. 느리면 느린대로, 그것도 여행이지 않은가. 


이게 웬일인가. 백일섭의 속도로 걸으니 베를린의 거리가 보다 잘 보였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갈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 조급하게 걸어나갔다면 놓쳤을 일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무시하곤 했던 백일섭의 속도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백일섭은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여행을 즐기고 만끽하고 있었다. 그걸 몰랐던 건, 마음이 급하기만 했던 우리들이었다. 


백일섭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가 울컥하게 한다. "<꽃보다 할배> 사랑하시는 시청자 여러분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처음에는 조금 미숙하지만, <꽃보다 할배>를 위해서, 제가 따라가기 위해서 재밌게 열심히 할게요. 파이팅!" 파뜻하고 정겨운 우리네 아버지, 백일섭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음 여행에도 꼭 참여했으면 좋겠다. 그의 속도로부터, 그의 배려로부터, 그의 최선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