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몸소 겪었던 '꽃할배'들에게 베를린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됐던 시절에 미군 관할 검문소였던 체크 포인트 찰리, 베를린 장벽 공원인 월 메모리얼 파크를 둘러보는 꽃할배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역사의 현장을 걷는 삶이 역사인 이들의 발걸음이 묵직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꽃할배들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곤히 잠을 잤던 꽃할배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아침을 맞이한다. 열정 가득한 이순재는 밤늦게까지 씨름했던 대본을 다시 손에 쥔다. 신구는 청바지를 입더니 "너무 애들 옷 같지 않아?"라며 이서진에게 검사를 맡는다. 김용건은 어김없이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고, 박근형은 그런 동생의 말에 추임새를 넣는다. 


그런데 웬일인지 백일섭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이른 시간부터 가방 정리에 여념이 없다. '건건'의 수다에 웃음을 짓다가도 다시 짐정리에 매진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꽃할배들이 식당에 하나 둘 모여 식사를 시작한다. 식탁 위에는 웃음꽃이 피고, 분주한 대화 속에 식사가 마무리돼 간다. 영원한 짐꾼 이서진은 오늘 출발 시각은 오전 10시라고 브리핑한다. 백일섭은 조용히 밥을 다 먹은 후 과감히 선언한다. 


"오늘 나는 아홉 시 반에 출발할 거야. 찬찬히 가면서 커피도 한잔 먹고, 맨날 뒤따라 가니까.."



그 말을 듣고나자 백일섭의 행동이 이해가 가는 동시에 왠지 모를 짠함이 몰려왔다. 다리가 불편한 백일섭은 걸음걸이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맨끝에 뒤처져 걸었다. 6년 전에 떠났던 첫 여행 때부터 그랬다. 직진 순재는 저만치 앞서나가서 보이지도 않았고, 신구와 박근형은 중간 즈음에서 걸어갔다. 이 순서는 마치 <꽃보다 할배>의 공식과도 같았다. 


백일섭은 매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고 또 걸어야 했다. 느린 걸음으로 따라가느라 바빴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 백일섭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또,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민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몸이 그리 좋지 않으면 스스로 출연을 고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쓴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백일섭도 그런 시선이 존재한다는 걸 몰랐을 리 없다. 그라고 왜 다른 일행들에게 미안하지 않았겠는가. 매번 자신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갔던 길을 되돌아 오는 형들에게 왜 미안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백일섭은 다른 이들보다 30분 먼저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뒤처지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여행을 함으로써 다른 일행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여섯 명이 합심해서 다니는 게 (호흡이) 맞아야지. 내 자신한테도 지면 안 된다."


그것이 백일섭의 최선이었고, 또 배려였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백일섭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를 내면서 말이다. 혼자 먼저 나와서 느긋하게 걸을 수 있게 되자 백일섭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내 속도로는 잘 걸어. 여행이라는 게 이렇게 천천히 가면서 쉬엄쉬엄 가는 거지. 막 바빠, 다들." 그렇다. 느리면 느린대로, 그것도 여행이지 않은가. 


이게 웬일인가. 백일섭의 속도로 걸으니 베를린의 거리가 보다 잘 보였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갈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 조급하게 걸어나갔다면 놓쳤을 일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무시하곤 했던 백일섭의 속도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다. 백일섭은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여행을 즐기고 만끽하고 있었다. 그걸 몰랐던 건, 마음이 급하기만 했던 우리들이었다. 


백일섭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가 울컥하게 한다. "<꽃보다 할배> 사랑하시는 시청자 여러분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처음에는 조금 미숙하지만, <꽃보다 할배>를 위해서, 제가 따라가기 위해서 재밌게 열심히 할게요. 파이팅!" 파뜻하고 정겨운 우리네 아버지, 백일섭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음 여행에도 꼭 참여했으면 좋겠다. 그의 속도로부터, 그의 배려로부터, 그의 최선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나 김은숙이야!'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엄청난 기대 속에 방영됐던 tvN <미스터 션샤인> 첫 회는 명백히 김은숙 작가의 자기 증명이었다. 그건 자신감이기도 했고, 과시이기도 했다. 누가 뭐라 해도 김은숙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파워 있는 작가가 분명하다. 그 이름만으로도 거액의 투자를 손쉽게 이끌어내고, 깐깐한 톱스타들의 캐스팅을 가능케 한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은다. 


제작비 약 430억 원의 웅장한 스케일, 김은숙 작가의 단짝인 김응복 PD가 구현한 수려한 영상미, 전작의 인연으로 흔쾌히 특별출연한 여러 배우들(진구, 김지원)까지 <미스터 션샤인>에선 확실히 대작의 아우라가 엿보였다. 김은숙 작가는 첫 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는 시청률 8.852%(닐슨코리아 유료가구플랫폼 기준)였다. 역대 tvN 드라마 중 첫 방송 기준 시청률 1위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구한말(舊韓末)이라는 격변의 시기와 그 시공간을 살아갔던 인물들의 얽히고 설킨 인연. <미스터 션샤인>은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인물들을 소개하는 데 1회 전체를 할애했다. 시대극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쇄국(鎖國)의 길을 걷는 조선은 멸국(滅國)을 향하고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자들은 그저 자신의 권세를 지키고 탐욕을 채우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민초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주검뿐이었다. 가족을 잃은 민초들은 절망했고, '역적이 되겠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진짜 역적은 따로 있었다. 시세(時勢)에 따라 양심을 팔아먹었던 권력자들은 자신의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국도 서슴지 않았다. <미스터 션샤인>은 이완용을 옮긴 게 분명한 친일파 이완익(김의성)을 통해 그 비루함을 그린다. 



노비 부모 밑에서 태어난 유진 초이(이병헌)은 그의 어머니(이시아)를 이용해 한성판윤 자리에 오르려던 주인 김판서(김응수)의 계략에 부모를 모두 잃는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유진은 미국으로 건너가 해병대 장교가 된다. 부모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는 "내 조국은 미국이야. 조선은, 단 한번도 날 가져 본 적이 없거든."이라 말하는 검은 머리 미국인이 됐다. 유진에게 조선은 끔찍한 기억일 뿐이었다.


김희성(변오한)은 김판서의 손자다. 유진의 어머니가 유진을 살리기 위해 인질로 잡았던 김판서의 며느리 뱃속에 들어있던 아이가 바로 김희성이었다. 유진과 김희성은 참으로 기구한 운명으로 얽혀있는 셈이다. 고애신(김태리)의 부모는 의병 활동을 하다 이완익에게 죽임을 당했다. 애신은 사대부인 할아버지의 집에 맡겨져 자랐다. 부모의 피가 어디가겠는가. 그는 치장보다는 사격술을 배웠고, 부모처럼 조선을 위해 싸워 나간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난했다. 현대극과 달리 시대극은 아무래도 설명이 많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설명이 조금 지루한 감이 있었다. 느릿한 전개를 감당하고, 빈틈을 채운 건 화려한 영상미였다. 아무리 김은숙이라 하더라도 시대극의 전형성을 따라가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캐릭터도 아직까지는 불투명하다. 시청자들이 매력적이라 느낄 만한 포인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물론 속단은 이르다. 맛깔스러운 대사를 통해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고, 그런 캐릭터들 간의 관계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드라마의 재미를 이끌어내는 김은숙 작가의 필력은 아직 발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개요가 나온 만큼 본격적인 시작은 2회부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각각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던 인물들이 만나게 되고, 서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 드라마의 성패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스터 션샤인>은 시대극이라는 옷을 입고 있지만, 그 표피를 걷어내면 결국 '로맨스'로 귀결된다. 유진과 애신의 사랑을 중심으로 애신의 정혼자 김희성, 애신에게 연정을 품은 구동매(유연석), 유진을 사모하는 쿠도 히나(김민정)까지 얽히고설킨 인물들 간의 애정 관계가 <미스터 션샤인>의 핵심적인 동력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극중에서 사랑을 나누게 될 이병현과 김태리의 나이 차이는 무려 20살이다. 이병헌은 "물리적인 나이 차는 나지만 연기를 함에 있어서는 전혀 그런 것들이 의식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물리적인 나이 차를 실제로 맞닥뜨리는 건 시청자들이다. 불편함은 시청자들의 몫이라는 이야기다. 유진과 애신이 조우하게 되는 2회부터 영포티(Young Forty) 논란은 뜨거워질 전망이다.


과연 <미스터 션샤인>이, 김은숙 작가가 이 난관을 극복해 낼 수 있을까? 억소리나는 출연료 때문에 한 차례 홍역을 겪은 이병헌은 연기력을 통해 자신의 진가를 드러낼 수 있을까? 시청자들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라진 <미스터 션샤인>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여전히 이 드라마에 대한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자신감일지 능력에 대한 과신일지 지켜볼 일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