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그는 이름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손예진이라는 이름에는 다양한 얼굴들이 층위를 이루고 있다. <연애소설>(2002), <클래식>(2003), KBS2 <여름향기>(2003)에서는 청순가련한 멜로의 주인공이었고,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에선 최루성 로맨스로 사람들의 감정을 뒤흔들어 놨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배우 손예진의 초창기 얼굴이다. 


SBS <연애시대>(2006)는 손예진의 연기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였다. 언제까지나 ‘청순가련한 여자’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에 머무를 순 없는 일이었다. 대중이 바라는 요구를 거부하는 건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 선택은 손예진에게 자유를 부여했다. 배우 손예진의 보폭은 여유로워졌고, 그의 얼굴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표출됐다.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진 손예진은 더욱 과감해질 수 있었다. 



<아내가 결혼했다>(2008)에서 연기했던 주인아는 사랑스럽고 예측불허의 매력을 지닌 캐릭터였는데, 손예진이 아닌 주인아는 상상하기 어렵다. <오싹한 연애>(2011)에서는 로맨틱 코미디도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고, <공범>(2013)에서는 아버지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스릴러 연기를 보여줬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에서는 고난도의 액션마저도 완벽히 소화해냈다. 도대체 못하는 게 뭐야?!


그런가 하면 광기어린 모성애를 섬뜩하게 표현했던 <비밀은 없다>(2016)는 손예진의 또 다른 발견이었다. 또, <덕혜옹주>(2016)를 통해 성숙한 내면 연기로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이제 더 이상 손예진을 어떤 배우라고 설명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그가 쌓아올린 얼굴의 층위는 매우 다채로울 뿐 아니라 굉장히 단단하다. 흔들림이 없는 손예진의 활약은 이제부터 더욱 거침없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2018년에도 마찬가지다. 손예진이라는 이름이 스크린과 TV를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온다. 3월 14일 개봉한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200만 관객(2,321,026명, 4월 1일 기준)을 훌쩍 넘어섰다. 극장가의 비수기를 아랑곳하지 않는 흥행 질주다. 3월 30일 첫 회가 방영된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하 <예쁜 누나>)는 시청률 4.008%(1회), 3.752%(2회)로 순조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동명의 일본 소설과 영화를 리메이크한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비가 내리면 돌아오겠다 믿기 힘든 약속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내가 장마가 시작되는 날에 정말 나타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원작이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다케우치 유코의 매력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만나러 갑니다> 역시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힘에 영화의 운명을 맡긴다. 


무거운 짐을 넘겨받은 손예진은 이 말도 안 되는 유치한 판타지에 현실감을 부여하고, 관객들을 순식간에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 과정이 너무도 매끄러워서 눈치를 채기 어려울 정도다. 관객들은 어느새 수아의 입장에 몰입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처럼 관객들을 설득하는 손예진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인데, 그만큼 뛰어난 연기력과 매력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도 손예진의 힘은 도드라진다. 주인공 윤진아는 35살의 직장인 여성이다. 드라마는 자연스레 30대 여성의 삶, 특히 회사 생활에 주목한다. 직장 여성의 하이퍼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데 분량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이는 윤진아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애시대>를 통해 ‘현실 연기’에 눈을 떴던 그는 <예쁜 누나>에서 30대 여성의 삶을 또 한번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수아는 엄마로부터 조건 좋은 남자와 결혼하길 강요받고, 회사에서는 능력은 물론 여성성까지 요구받는다. 성차별, 성희롱에 무감각해야 하고, 상사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 손예진은 단 2회만에(사실 첫회만으로 충분했다) 캐릭터를 잡아나갔고, 시청자들에게 설명해 냈다. 드라마들이 초반에 난항을 겪는 경우가 많은데, <예쁜 누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안착했다. 손예진의 힘이다.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흥행을 일궈내고 있는 손예진은 믿고 보는 배우이자 확실한 카드이다. 그 정도의 신뢰를 주는 배우는 송강호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보다 손예진의 활약이 돋보이는 건, 그가 대중에 의해 일방적으로 소비되기보다 대중의 소비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여성의 역할이 점점 더 협소해지고 있기에 손예진의 존재감은 더욱 빛난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설렘이 한가득이다.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내리고, 남자는 우산을 하나만 구입해 펼쳐든다. 여자는 묻는다. "너, 근데 왜 우산 하나만 사왔어? 그것도 빨간색으로?" 남자는 능청스럽게 둘러댄다. "몰라? 우산이랑 라이터 사는 돈이 제일 아까운 거?" 여자는 남자의 넉살이 싫지 않다. "이걸로 가다간 둘이 반은 다 젖겠다." 여자의 힌트 섞인 불평에 남자는 슬그머니 어자의 어깨를 끌어 안는다. 


우산 하나에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술기운 때문일까. 남자는 장난을 빙자해 용기를 냈고, 여자는 어깨를 감싼 남자의 손길이 새삼스레 설렌다. 우산 아래 웃음이 만발한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어느새 봄비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이 시간이 좀더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걷고 또 걷는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카를라 브루니(Carla Bruni)의 'Stand By Your Man'이 참 달콤하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이하 <예쁜 누나>)는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다. 윤진아(손예진)에게 서준희(정해인)는 20년지기 절친 서경선(장소연)의 남동생이자 친동생의 오랜 친구이다. 준희의 입장에서도 진아는 누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절친의 누나다. '그냥 아는 사이'로 뭉게긴 훨씬 친근한 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애틋한 감정이 싹튼 관계도 아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3년 만에 해외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준희는 진아가 여자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그냥 아는 누나'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신경 쓰인다. 괜히 밥을 사달라고 하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며 장난을 친다. 또, 진아가 연인 이규민(오륭)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양한 감정에 휩싸인다. 


진아도 알고 있다. 준희가 자신의 일상 속에 불쑥불쑥 들어오고 있다는 걸 말이다. 자신을 '곤약'에 비유하는가 하면 '어린' 여성과 바람을 피웠던 연인과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느꼈던 허무함, 그 빈 공간에 준희가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그의 짓궂은 장난이 싫지 않고, "누나가 더 예뻐."라는 말에 마음이 설렌다. 준희가 더 이상 친구의 남동생이 아님을 진아는 알고 있다. 



진아가 알고 있는 것이 또 있다. 어쩌면 그건 시청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준희가 진아를 선택하는 것보다 진아가 준희를 선택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 말이다. 준희에겐 잃을 게 없어 보인다. 큰 고민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무엇이 됐든 덤벼들 수 있는 나이다. 자유분방한 듯 보이는 그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기껏해야 친누나의 반응이 걱정되는 정도랄까.


반면, 진아는 30대 여성의 고된 삶을 견뎌내고 있다. 남성이 40대에도 '아재'라는 귀여운 별명을 얻는 것과 달리 여성은 30대만 돼도 패널티를 부과 받는다. '연애 시장'에서 밀려나고, '결혼 적령기'라는 사회적 억압의 대상이 돼야 한다. 가족도 그 짓누름의 대열에 합류한다. 진아의 엄마 김미연(길해연)은 딸의 결혼에서 자신의 위신을 따진다.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조건'들을 우선적으로 강요한다. 


그뿐인가. 여성으로서 그의 회사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다.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능력'뿐만 아니라 '여성성'도 요구받기 때문이다. 커피 전문 기업의 매장 총괄팀 슈퍼바이저인 진아는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게다가 까칠한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고, 후배들을 살뜰히 챙긴다. 거기에는 모종의 합의, 여성들은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조직에 봉사하고 희생하는 모성적 존재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논리가 숨겨져 있다.



애사심(愛社心)이라는 명목하에 회식 참여가 강제되고, 친화력과 동료애라는 미명하에 성차별과 성희롱이 묵인된다.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진아의 회사는 30대 여성으로서 진아가 견뎌내야 할 무거운 짐이자 삶의 굴레다. 이런 참담하고 꿉꿉한 상황 속에서 연하 남성의 대시는 실로 상큼하고 설렌다. 낭만적 도피처라고 할까. 


그런데 이러한 연애 양태를 과연 도피처라 부를 수 있을까. 진아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주는 갑갑함은 물론 연애에서조차 '누나'로서 상대방을 보살펴야 하는 모성적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 물론 준희는 규민에 비해 훨씬 더 괜찮은 남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아와 준희, 두 사람의 관계에서 누가 더 높은 장벽에 부딪칠지, 그 수많은 난관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주도적 역할을 누가 담당할지는 뻔하다. 그건 '누나'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진아는 사정이 나은 편일까. 이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려면 드라마의 제목처럼 밥을 잘 사줘야 하고(그만큼의 경제적 능력이 갖춰져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예뻐야 하는데, 진아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남자들은 예쁘면 그냥 마냥 좋냐?"라는 질문은 핵심적이고, "누나가 더 예뻐."라는 준희의 대답은 결국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남성들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예쁜 여자>는 대한민국 사회, 정확히는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의 모습을 적시한다. '밥을 잘 사준다'는 말은 '밥을 잘 해준다'는 말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고, '예뻐야 한다'는 외모적 조건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손예진이기에 가능한 판타지'라고 할까. 드라마의 완성도,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와는 별개로 <예쁜 여자>를 보면서 씁쓸함이 묻어나는 건 그 때문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