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물질. 이를테면 비소, 석면, 벤젠, 카드뮴.. 이들은 대표적으로 암을 유발하는 요인이다. 이런 발암물질 저런 발암물질이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스트레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요즘 가장 '쎈' 발암요인은 JTBC <품위있는 그녀>의 품위 따위는 개나 줘버린 박복자, 바로 김선아가 아닐까? 워낙 캐릭터가 '강성'인 탓도 있지만, 이를 해석하고 풀어내는 배우의 역량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지나지 않을 터. 물 만난 고기마냥, 아껴뒀던 연기력을 쏟아내듯, 모든 걸 발산해내는 김선아는 그야말로 '소름'이다. 



박복자는 간병인이다. 그는 안태동 회장(김용건)의 간병을 위해 고용된다. 둘째 며느리 우아진(김희선)은 똑부러지는 평소의 성격과는 달리 철저한 조사 없이 박복자를 집안에 들인다. 이 섣부른 선택은 결국 파국을 불러 오고 만다. 박복자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안 회장을 유혹한다. 자신의 육체적 매력과 다정함을 발휘한다거나 안 회장을 '환자'가 아닌 '남자'로 대하며 그의 숨겨진 욕망을 끄집어내는 야릇한 방법을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 이에 홀라당 넘어간 안 회장은 박복자의 빚을 청산해주기에 이른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이 정해진다. 그 운명은 생각보다 너무 가혹한 나머지 순서와 등급이 정해져서 좀처럼 그 이동이 허락되지 않는다."


<품위 있는 그녀>는 대놓고 '계급 드라마'를 표방한다. 사람마다 순서와 등급이 정해지고, 그 이동이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고 못박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을 터. 한 종류의 사람은 체념한 채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자 할 것이다. 박복자는 전형적인 후자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달려든다. 신분 이동을 위한 유일한 동아줄인 안 회장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는 누구보다 절실하다.



과연 박복자의 욕망은 충족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하류층'을 벗어나 저들만의 세상에 합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1회의 첫 장면에서 처참히 살해 당한 박복자의 시신을 통해 그의 욕망이 끝내 '제거'됐음을 목도했다. 물론 드라마의 친절한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박복자로 대변되는 '상류층 합류'에 대한 욕망과 꿈이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성벽을 둘러치듯 공고한 저들만의 세계는 결코 '아랫것'들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복자라는 존재로 인해 잠시나마 풍비박산났던 안태동 일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카르텔은 '보험 회사'가 돼 그들을 보호하리라. 굳건한 경제력은 그들의 삐끗했던 지위를 바로 세워 온전히 보전할 테고, 그 경제력이 보장하는 권위와 권력은 주위의 시선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수군거림은 풍문처럼 흩어지고, 그들은 다시 '품위'를 내세우리라. 그것이 우스꽝스러우면 어떠하리. 우리는 여전히 '박복자'의 욕망을 벗어버리지 못하지 않았던가.



"절대 채워지지 않는 그것.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민낯을 드러낸 욕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멈추지 않는다. 가지지 못한 걸 가져야 하는 인간의 욕망. 우리 모두의 불행은 거기서 출발했다."


'정해진 결론'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품위있는 그녀>를 시청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그렇다. 첫 번째 까닭은 바로 경악스러운 캐릭터 박복자로 분한 김선아의 물 오른 연기력이다. 그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서울말을 오가며 박복자의 능청스러움과 잔망스러움을 100% 표현하고 있는데, '역시 김선아!'라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캐릭터에 몰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선아가 아니라면 누가 박복자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대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다만, 초반의 의뭉스러운 연기가 본색을 드러낸 지금보다 좀더 매력적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박복자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언뜻 보기에 그는 "악으로 깡으로 덤비는" 그의 추진력은 가히 불도저를 연상케 하고, 야망을 이루기 위해 안 회장을 이용하는 악녀로 그려지고 있지만, 드라마는 박복자에 대한 평가를 최대한 유보하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가령, '우아진'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이나 안 회장에게 명품 백을 선물받고 화장실에 가서 몰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 등은 그에게 여린 마음이 내재돼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과거의 상처들과 현재의 고달픔이 그를 더욱 낭떠러지로 몰고 있는 것이리라.



한편, <품위있는 그녀>를 시청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인 우아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안태동 일가의 실질적 안방마님인 우아진은 그 이름만큼이나 우아하고, 품위 있는 인물이다. 그는 첫째 며느리 박주미(서정연)와 대척점에 서 있고, 그가 어울리는 브런치 모임의 차기옥(유서진), 김효주(이희진), 오경희(정다혜)와도 다른 선상에 서 있다. 상류층에 속해 있지만, 허영심에 갇혀 있지 않은 캐릭터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사모님이라 할까. 이성적이며 합리적이고, 차분하면서 사려깊다. 이런 '인간적인' 사모님, 우아진 역할을 김희선은 빈틈없이 채워냈다. 


우아진의 세상은 흠집 하나 없이 완전했다. 시아버지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시고, 남편 안재석(정성훈)을 물심양면으로 내조할 뿐 아니라 딸 지후(이매치)를 철두철미하게 뒷바라지한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잘못 들인 간병인 박복자로 인해 균열이 만들어지고, 남편의 불륜, 매력적인 남사친의 등장 등으로 그의 세계는 조금씩 깨져간다. 과연 이 위기 상황 속에서도 우아진은 자신의 '품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거침없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는 김희선의 활약 여부도 관심시다.



"멈춰, 당신! 여기서 멈춰!"

"그녀의 말대로 그때 내가 멈췄더라면 난 지금은 살아 있었을까?"


익숙히 봐왔단 '막장' 구조를 답습하면서도 <품위 있는 그녀>가 독특할 수 있는 까닭은 아무래도 '캐릭터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박복자와 우아진의 대결은 그래서 흥미롭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 과정의 독특함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눈길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1회에서 2.044%(닐슨코리아 기준)였던 시청률은 상승세를 보이며 4회에는 3.285%까지 올랐다. 5회 방송에는 '윰블리' 정유미의 특별출연이 예고돼 있어 더욱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복자라는 캐릭터가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강렬하게 '발암요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시청자들의 '응원'은 자연스레 우아진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데, 이 휘청거리는 무게중심이 <품위있는 그녀>의 상승세를 저해하진 않을지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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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한결같기를 원하면서도 변화하기를 원하는 그게 나 

평범하기를 원하면서 특별하기를 원하는 그게 나


모순됨. 이치의 어긋남, 그 앞뒤 다름에 소스라치게 진저리치면서도 그것이, 그것도 결국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어쩌면, 감히 말하건대 삶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2001년 2월 14일, 가수 이소라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남긴 짧은 일기. 한동안 저 문장에 묶여 살았다. 문장은 짧았으나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길고도 길었기에. 그리고 2017년 6월 29일, 또 하나의 '고백'을 마주했다.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히긴 싫다." 이효리였다. 그는 담담했고, 질척였지만, 밉지 않았다. 



1998년 1세대 걸그룹 <핑클>로 데뷔한 그는 단숨에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365일 청순하고, 예쁘고, 눈웃음을 쳐야하는 '걸그룹'의 멤버라는 포지션은 '야생마'에 가까운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으리라. 2003년 드디어 솔로로 데뷔한 이효리는 내재된 욕망과 잠재된 에너지를 분출하며 대한민국의 이효리의 무대로 만들어버렸다. '텐미닛(10 Minutes)', '유고 걸(U-Go-Girl)', '치티치티뱅뱅(Chitty Chitty Bang Bang)'를 연달아 히트시켰고, 2013년에는 문제적 노래 '미스코리아'를 통해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음악 속에 압도적인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까지 녹여낸 이효리는 여성 솔로 가수로서 독자적이고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그는 가수로서뿐만 아니라 예능인으로서도 존재감을 발휘했다. KBS2 <해피투게더>, SBS <패밀리가 떴다>에서 보여준 가식 없는 모습들은 '섹시한 이효리'라는 이미지에서 그를 자유롭게 했고, '스타 이효리'라는 벽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꾸미지 않은 털털한,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 속에서 대중들은 인간 이효리를 발견했고, 더욱 그를 사랑하게 됐다.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히긴 싫다.. 어떤 뜻인지 알겠는데, 가능하지 않은 얘기가 아닌가요, 혹시?" JTBC <뉴스룸>의 문화초대석에 출연한 이효리에게 손석희 앵커는 그리 묻는다. 이효리의 대답이 궁금하다. "가능한 것만 꿈꾸는 건 아니잖아요?"라며 "그게 제 욕심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뒤통수를 맞은 건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손 앵커는 "질문한 사람을 굉장히 머쓱하게 만드시네요."라며 이효리의 말을 수긍했고, 두 사람은 서로 웃음을 터뜨리며 인터뷰를 마무리 지었다.


문화초대석 인터뷰는 매번 뜨거운 화제를 불러일으키는데, 손석희와 이효리의 만남은 그 파괴력이 더욱 컸다. 선공개곡 '서울'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감회와 애증, 그리고 '오해'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부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오랜만의 복귀가 부담스럽지 않냐는 질문에는 오히려 '설레고 재미있다'고 대답하는 담대함은 역시 이효리라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단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이고, '발산하는 욕구를 드러낸 것'이라고 대답하는 그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또, 2013년 발매한 5집 '미스코리아'에서부터 음악 스타일이 달라졌다는 손 앵커의 지적에 대해 "가수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면서 "나는 스킬을 가진 가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량부족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뭘까"라고 고민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나는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자신 있다. 떠들지 말고 내 노래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자신만의 영역에 대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음악에 대한 이효리의 고민과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이효리가 돌아왔다. 결혼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소길댁'으로 살기를 자처했던 그가 돌아왔다. 카메라와 대중, 그 집요한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오롯이 '자연인'으로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던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인기'를 부여잡기보다 '잊힘'을 선택했던 이효리가 다시 대중들 앞에 서기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생각이 '소길댁 이효리'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만든 것일까. 그 까닭은 지난 17일 MBC <무한도전>의 방송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제주도로 찾아온 무한도전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효리는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사실 제주도에서 멋진 기억만 남긴 채 사라져버릴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보다 아름답게 내려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아름답게 내려오기, 왠지 모를 뭉클함이 피어 올랐다. 그건 이효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한도전>에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했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보내는 화두이기도 했다. 이효리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변화하기'에 나서고 있었다. 


최근에는 JTBC <효리네 민박>이라는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감춰져 있던' 남편 이상순과의 깨가 쏟아지는 알콩달콩한 생활과 제주도에서의 '심심한 일상'을 보여주고,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꺼내놓기를 원하는 이효리. 그는 조금씩 보폭을 넓혀가며 대중들과 교감하길 바라고 있다. 그런 그를 대중들은 격하게 반긴다. 이 반김은 단순히 '스타'에게 보내는 것과는 달라 보인다. 그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빽빽한 감정이고, 교감이다. 이효리는 이렇게 노래한다.


며칠 전 냉장고에서 꺼내놓은 식빵 

여전히 하얗고 부드랍기만 한 식빵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이상해

변하지 않는 건 너무 위험해


얼마 전 잡지에서 본 나의 얼굴

여전히 예쁘고 주름 하나 없는 얼굴

조금도 변하지 않는 이상한 저 얼굴


변하지 않는 걸 위해 우리 변해야 해



'한결같기를 원하면서도 변화하기를 원하는 그게 나. 평범하기를 원하면서 특별하기를 원하는 그게 나'라고 말하던 이소라의 고민과 이효리의 그것이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다. JTBC <비긴 어게인>을 통해 '변화하기'에 나선 이소라의 '출현'과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지만 잊히긴 싫'은 이효리의 '재등장'도 맞닿아 있지 않은가. 그들의 '변화하기'를 두 손 벌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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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칙칙.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여. 바람을 가르는 소리여. 칙칙"


흔히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에게 '천의 얼굴을 가진'이라는 (진부한) 수식어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상투적인 표현을 꺼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배우들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박철민'처럼 말이다. 그의 얼굴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고, 그의 연기에는 그 4가지 감정들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표현된다. 그 정도로 박철민을 '천의 얼굴'이라 부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순히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드러내는 수준을 넘어서 그 감정들을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사칙 연산을 무한대로 해낸다. 그래서 박철민의 연기는 '깊다'. 


놀랍게도 그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던 그는 '연기'가 너무도 하고 싶어서 극단을 찾았고, 그 세계를 전전했다. 영화 <목포는 항구다>(2004)에서 가오리 역으로 출연했던 박철민은 권투 동작과 함께 내뱉는 익살스러운 대사를 단박에 유행어로 만들며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을 맡으며 '명품 조연'으로 자리매김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여직원과 그 아버지의 고독한 싸움을 그린 <또 하나의 약속>(2013)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했다. 


배유람의 인스타그램(www.instagram.com/gaeddac)


최근에는 MBC <군주>에 출연 중인데, 세자 이선(유승호)의 스승인 우보 역을 맡아 특유의 애드리브를 발휘하며 촬영장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8년 동안 여섯 작품(영화 <4교시 추리영역>(2009),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2011), SBS <무사 백동수>(2011), MBC EVERY1 <상상고양이>(2015), 영화 <조선마술사>(2015))을 함께 했던 인연은 곧 찰떡 궁합으로 이어져 수목 드라마 시청률 1위를 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군주>에서의 모습은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보여줬던 악역(이조판서 김의교)의 그것과는 180도 달라 눈길을 끈다.


이처럼 박철민의 연기는 다채롭다. 한때 '코믹 연기'로 규정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는 연극 무대에서 다져온 연기력으로 자신에 대한 '선입견'을 과감히 돌파해냈다. "어쨌든 행복을 느끼는 일을 이 나이에도 하고 있고, 나의 장단점을 볼 줄 아니까 참 다행이지 않나?" (<오마이뉴스>, 'B급 배우' 자처하는 박철민, "난 잡놈 중 잡놈")고 말하는 박철민은 상업 영화, 독립 영화, TV 드라마와 예능(SBS <정글의 법칙 와일드 뉴질랜드>), 연극 무대까지 그야말로 종횡무진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 이정민


"나는 까부는 게 좋다. 익살부리고 오버하기도 하고 그러면 더 신난다. 그러다 최고의 지점에서 행복하게 끝난다. 슬픈 장면도 마찬가지더라. 하면 할수록 더 슬퍼진다. 아파지고 더 먹먹해지고. 이런 감정들이 아주 훌륭한 경험이지만, 자주하지 말자는 생각도 했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박철민의 연기, 그 본질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어떨까. 대중들은 왜 박철민이라는 배우, 혹은 박철민이라는 인간에 매력을 느끼는가. 감히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하자면, 그건 아마도, 그가 (남들은 쉽사리 외면하고 마는)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아는 진솔한 사람이며, 그것을 대중들과 교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솔직함'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러한 '능력'은 대중들과 부대끼고 호흡해야 할 배우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의 가족> 출연은 박철민에게 큰 도전이었다. 단순히 '삼성과의 싸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실화'였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전까지 주로 '밝은' 연기를 해왔던 그가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전했고, 결국 감동적인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투자를 받기 어려웠던 저예산 영화의 주연 배우, 그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자신이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였다면 흥행에 더욱 도움이 됐을 거라며 자책했다.


ⓒ 이선옥


"저 같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 걱정이 되긴 합니다. 막 살고, 딴따라로 사는 사람인데…. 저보다 더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들이 이 사업을 함께 하면, 더 많이 널리 알릴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저라도 할 수 있다면 하겠습니다. 인기 없는 대신 발품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전태일다리 이름짓기 범국민캠페인 < 808행동 > 선포식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영화에 출연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박철민. 그는 지난 2010년에는 전태일 40주기 홍보대사를 맡기도 했다. 당시 "내가 어릴 때부터 영향을 받았던 인물, 정서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던 인물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에서 참여하게 됐다고 이유를 밝히면서 최선을 다해 전태일의 '정서적인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2010년'이 정치적으로 어떤 시기였는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그 '암흑기'를 떠올리는 데 무리가 없으리라. 


한편, 박철민은 2017년 6월 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무대에 올랐다. 6 · 10 민주항쟁 30주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한열 열사의 추모 문화제가 열리고 있었고, 박철민은 사회를 맡았다. 그는 이한열과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 "이 열사는 중2 때 같은 반 친구였다. 그는 2분단장, 나는 3분단장이었다. 6월이 되면 부끄럽게 사는 제 인생을 반성하면서 이 열사를 한없이 그리워한다." 이한열과 중학교 동창이었다는 인연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또 한번 부끄러워했다. 



"저는 이번 선거 때 대통령님 못 찍었습니다. 아내하고 늘 싸웠는데요. 끝나고 나서 한 2주일 만에 제가 술 한 잔 먹고 "여보, 당신의 선택이 멋졌어. 훌륭했어"라고 말하고 사과했어요."


지난 6월 2일 박철민은 서울 강남구 구립서울요양원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났다. '치매국가책임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던 문 대통령의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코미디언 김미화와 함께 사회를 맡았던 그는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찍지 못했지만, 2주일 만에 (문재인 대통령을 선택했던) 아내에게 사과를 했다며 고백(?)하며 문 대통령의 웃음보를 터뜨렸다. 솔직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가 요양원에 갔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박철민의 개인사와 연결돼 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10여년 동안 치매를 앓고 있었고, 이 때문에 자연스레 치매라는 병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치매 홍보대사를 맡으며 '치매 인식 개선'을 위한 활동에 뛰어들었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치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또, 일상 속의 직접적인 경험과 치매 환자가 65만 명(2015년 기준)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 등은 그에게 치매라는 병이 개인의 헌신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병이라는 깨달음을 줬을 것이다. 


ⓒ 쿠키뉴스 스토리펀딩 치매편


"노래 부르기 좋아하시고, 그림 잘 그리시고. 그래서 더 애틋합니다.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시지만 너무나 사랑스럽고 선한 모습을 살아가고 계시죠. 그렇지만 예전에 가족과 함께했던 기억들, 추억들을 간직하시지 못하고 계셔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지난 26일, 박철민은 저소득 치매 노인들의 지원을 위해 4천 만 원을 기부했다. 치매학회 홍보대사로 선정돼 받은 활동비를 전액 기부한 것이다. "어머니 덕분에 받은 돈인데 당연하다"던 그는 치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역할을 재차 강조했다. 배우 박철민, 인간 박철민. 그의 '깊은' 연기의 뒤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다. 또, 중학교 동참 이한열을 떠올리면 밀물처럼 몰려오는 부끄러움도 있었다. 또, 사회적 문제에 대한 관심, 사회 속에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있었다. 


천 명의 '스타'가 만들어지는 것보다 한 명의 '배우'가 탄생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우'의 연기에는 그가 살아 온 굴곡진 인생과 그 안에서 생성된 '세계관'과 '가치관'이 오롯이 담겨지기 때문이다. 그건 '스타'를 찍어내는 '산업'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하물며 그가 '천의 얼굴'을 지녔다면 그 가치가 어떠하겠는가. 부디 천의 얼굴의 지닌 배우 박철민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져서 그가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가 '꿈꾸는' 일들이 더욱 원활히 이뤄지길 기대한다. 이 글이 쇠털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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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맑고 화창한 날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비가 조금 내려도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가볍게 뒤집어버리는 강풍이 불어닥쳤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려웠다. 부디 다음 날 아침에는 잠잠해지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가 커튼부터 젖혔다. 물기를 머금은 자동차 바퀴소리가 불길했지만, 도로 위에 남아있는 빗물이길 바랐다. 


아, 이럴수가.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고집스러웠다.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오스트리아 빈에 머무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만약 여행 일정에 여유가 (엄청) 많았다면, 인천 공항에서 사왔던 책을 들고 카페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독서를 하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언제나 여행자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원래 계획에 있었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도 흥미를 잃었다. 고작 1시간 거리에 있는 그곳의 날씨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이 빠졌다. 빈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위주로 일정을 짤 것인가, 비가 오더라도 브라티슬라바로 갈 것인가.. 순간 번뜩하고 제3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참에 아예 먼 곳으로 가볼까? 


부다페스트 역 내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비를 피할 수 있을 테고, 먼 거리를 이동하면 날씨가 바뀌거나 이동하는 시간 동안 비구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기특하기도 하지. 당장 구글 지도를 보면서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음, 음, 음.. 여기 있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 지나치게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그 곳. 3시간 정도면 적당하다 싶었다. 


부다페스트 역 외부 



"오길 정말 잘했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했던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여행에서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부다페스트의 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만들어 낸 풍경들이 경탄스러웠다. 놀라지 마시라. 하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졌다. 동유럽의 새파란 하늘을 만끽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대견함은 뿌듯함으로 진화했고,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잠시 쾌적한 부다페스트 거리를 걷다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동했다. 계획은 이랬다. 우선, 부다페스트를 가로질러 흐르는 도나우 강(Donau, 독일 남부에서 시작된 이 강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에 이르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으로 이어진다)과 강변에 세워진 국회의사당 등 주변(페스트 지역) 풍경을 감상하고, '부다 왕궁(Budavári Palota)'에 올라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ösök Tere)'를 비롯해 도심을 전반적으로 둘러보고, 저녁 무렵 '아경'을 보기 위해 다시 '부다 왕궁'에 오르기로 했다. 동선으로 보면 중복이라 비효율적이라 할 수 있지만, 도나우 강과 그 주변의 풍경을 낮과 밤, 중복으로 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날씨가 좋았다. 또, 부다 왕궁의 낮과 밤도 궁금했다. 인공적인 빛이 발산하는 아름다움도 매력적이지만, '햇빛'이라는 천연 조명의 깊은 맛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국회의사당


Calvinist Church


2호선을 타고 Keleti pályadvar 역을 출발해 Batthyány tér 역까지 이동했다. 지상으로 나오자 입이 떡 벌어졌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푸른 하늘이 그림처럼 빛났다. "이야, 진짜 오길 잘했다" 정말이지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걸으며 부다페스트의 낭만에 빠져들었다. 마냥 걷기만 해도 행복감이 솟구쳤다. 계획에 없던 즉흥성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자 쾌감은 더욱 커졌다. 


파리를 여행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트램(Tram)이 도심 외각에서만 운행을 하고 있어 굳이 탈 일이 없었다. 하지만 체코 · 드레스덴 · 빈에서는 그 활용도가 훨씬 커졌다. 부다페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버스는 노선이 복잡해 이용하기 어려운데, 트램은 훨씬 간단했다. 또, 애초부터 24시간 권(1,650 포린트 = 약 6,800원)을 끊어두었으니 대중교통을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부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트램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믿을 건 두 다리뿐,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19번과 41번 중 빨리 오는 트램을 타고 Batthyány tér 역과 부다 왕궁을 왕복했고, 다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Deák Ferenc tér 역까지 이동한 후 1호선으로 환승해 Hösök Tere 역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일들이 점차 익숙해는 게 느껴졌다. 여행지의 대중교통을 헤매지 않고, 제법 능숙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랄까.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회쇠크 광장)은 헝가리의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인데, 그 좌우에 부다페스트 미술관과 또 다른 미술관인 뮈처르노크가 위치해 있다. 광장 중앙에 있는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의 기념비는 그 높이가 36m에 달하고, 헝가리 민족의 수호신인 천사 가브리엘이 날개를 편 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기념비 아래에 아르파드(Árpád, 845년 경-907년 경)를 비롯한 헝가리 민족 초기 부족장 7명의 기마상이 있고, 기념비 양 옆으로 헝가리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 14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미욱한 중생이 헝가리의 역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저 푸르스름한 동상과 한없이 푸르른 하늘의 '깔맞춤'에 감탄을 한 후 서둘러 뒤편의 공원으로 이동할 밖에.


버이더후녀드 성






영어로 'City Park'라는 뜻의 시립 공원(Városliget)은 제법 규모가 컸다. 공원 내부에 동물원과 세체니 온천, 버이더후녀드 성(Vajdahunyad vára) 등이 있었고, 호수와 인공 분수 주변에는 휴식 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부다페스트의 시민들이 찾고, 많은 여행객들이 머무는 장소답게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왠지 모르게 동화 속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호수의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담뿍 맞으며 여유를 즐겼다.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다. 지도를 보면서 다음 동선을 머릿 속으로 그렸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선,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가서 부다페스트만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Corvin Mozi'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도 가보기로 하자. 








도심의 중앙부는 활력이 넘쳤다. '동유럽', 특히 '헝가리'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노후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었다. 패션 거리의 'C&A'라는 의류점 앞에서 만난 '브레이킹 댄스'는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그곳은 젊고, 힘차고, 에너지가 넘쳤다. 다만, 영화관은 생각보다 소박했는데, 예스러운 분위기가 남아 있어 멀티플렉스가 휩쓸기 전의 영화관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람쥐마냥 재빠르게 돌아다녔지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입장 시간이 지난 뒤라 건물 밖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서야 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됐다. 부다페스트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를 만나러 갈 타이밍이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두 다리는 한껏 지쳐 있었지만,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녹초가 된 두 다리도 살려내는 법이다.


아래의 사진은 부다 왕궁에서 내려다 본 부다페스트의 야경이다. 이 글을 읽어준 당신에게 보내는 아주 작은 선물이다. 비록 부족한 사진이지만, 마음껏 감상하길.. 마음껏 빠져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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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통독, 음독, 묵독, 정독, 미독(味讀), 속독, 발췌독. 


'읽기'의 다양한 방식이다. 흔히 '책(활자)'를 읽을 때 하나의 방법만 가지고 접근하기 쉽지만, '효과'와 '효율'을 생각하면 그 우직함이 항상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정독이 필요한 책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발췌를 해서 일부분만 습득해도 되는 책이 있다. 소리 없이 음미해야 하는 책이 있고, 크게 소리를 내서 읽어야 이해가 빠른 책도 있다. 마치 요리사가 칼을 선택할 때 다양한 용법을 고려하는 것처럼, 헤어 디자이너가 손님의 머리 상태를 보고 시술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처럼 책을 대하는 '독자'에게도 영리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드라마'는 어떨까. 그러니까 드라마의 '시청자'의 입장은 어떨까. 과장을 전혀 보태지 않은 객관적인 평가를 하자면, 우리는 너무도 완벽하게 '시청자'라는 포지션을 이해하고 있다. '드라마 시청학'이라는 과목이 있어 특별히 수강을 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로부터 그와 관련한 가르침을 받았을 리도 만무한데 말이다. 놀랍게도 '시청자'가 된 당신은 그때그때마다 스스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을 선택해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어젯밤, 혹은 오늘 아침 당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어쩌면 오늘 밤에 당신이 그리할 것처럼. 


가령, 모든 장면을 빠짐없이 봐야 하는 드라마가 있다. 이런 드라마는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서 끝나는 순간까지 그 긴장감을 유지시켜야 한다. 반면, (굳이 특정하진 않겠지만) 어떤 드라마는 '다른 짓'을 하면서 봐도 스토리를 이해하는 데 하등 문제가 없다. 대사 위주로 드라마를 따라가다가 갈등이 고조된 순간에 잠깐 화면을 응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귀로 보는' 드라마라고 할까. 또, 영상이 워낙 수려하고 유려해서 시선을 뗄 수 없는 드라마도 있다. 



한편, tvN <비밀의 숲>은 (시청자의 입장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드라마다. '검찰 스폰서 살인'이라는 메인 사건을 바탕으로 범인과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밝히려는 검사 황시목(조승우)의 추적극을 그린 <비밀의 숲>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니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넓게 퍼진 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시청자들은 빼곡히 울창한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한여진(배두나)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용의자' 선상에 올랐고,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문 채 끝도 없이 이어진다. 


허투루 넘길 장면이 없다. 반전이 숨겨져 있고, 복선이 깔려 있어 방심은 금물이다. 어쩌면 모든 장면들이 '떡밥'이고, 진실에 접근할 '단서'다. 독서로 치면 '정독'은 필수라고 할까. 모든 장면에 집중해야 한다. 황시목의 예리한 시선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이창준(유재명)과 서동재(이준혁), 영은수(신혜선)의 '의뭉한' 눈빛과 행동을 놓치면 다음 장면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혹시 혹시 빨래를 개키거나 홈쇼핑 잡지를 읽으면서 <비밀의 숲>을 볼 생각이라면 애초에 그만 둘 것을 정중히 권하고 싶다. 그렇게 봐선 이 드라마의 '참맛'을 느낄 수 없다. 



"왜 완전히 끝내지 않았지? 이 수고를 치르고서, 왜 굳이 여기야. 얻어지는 게 뭔데."

"들어가서 나오기까지 13분. 애매하다. 차장 말이 사실일까. 뭐지? 웃고 있다. 벨."

"경고. 벌. 차장을 벌할 수 있는 사람. 박무성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 김가영이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 차장에게 벌을 내리고자 할 사람."


<비밀의 숲>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래서 극도의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는 황시목의 추리를 따라간다. 자신의 기분을 이기지 못해 격분하고, 감정적인 선택과 판단으로 상황을 악화시키곤 했던 기존의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는 달리 황시목은 침착하고 논리적인 태도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나간다. 다시 말하면 '없던 캐릭터'이고,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없던 경험'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황시목의 추리는 상당히 섹시한데, 이는 뇌의 특정한 부위에 묘한 쾌감을 준다. 


여전히 사건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사건 재연 현장에 황시목과 함께 있었다'는 한여진의 진술로 황시목은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한 경찰의 의심을 (당장은) 지울 수 있었다. 범행도구로 쓰인 칼에 찍힌 지문에 대한 알리바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한 박무성(엄효섭)의 아들 박경완(장성범)의 행동도 의심스럽다. 그가 납치됐던 김가영(박유나)와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였고, 그를 몰래 촬영한 듯한 사진을 지우는 장면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차장 검사에서 검사장으로 승진한 이창준과 그를 컨트롤하는 실세 장인 이윤범(이경영), 그리고 그들을 '앞잡이'로 쓰고 있는 더 큰 집단의 존재. 그리고 그들이 덮어씌운 뇌물 혐의로 나락으로 떨어진 영일재(이호재)와 그 사실을 알아버린 딸 영은수. 이토록 깊고 지독한 미궁이라니. 과연 황시목은 범인을 밝히는 동시에 깊이 감춰진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시청자들은 황시목과 함께 이토록 촘촘히 우거진 그래서 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비밀의 숲'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비밀의 숲>은 연기, 연출(안길호 PD), 극본(이수연 작가) 등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웰메이드 드라마다. 이야기는 더할나위 없이 치밀하고 쫄깃하며, 연출은 세련되고 감각적이다. 조승우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는 놀라울 만큼 정성스럽다. 케이블 드라마의 것치고는 높은 편이긴 하지만, 시청률이 4%대에 머물고 있다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출발'이라는 안재현의 '명언(?)'을 떠올리며 <비밀의 숲> 정주행에 나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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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연예 뉴스도 '뉴스', 연예 기자도 '기자'라는 점을 잊지 말자."


기자가 '카더라 통신'의 유포자가 됐다. 씁쓸한 일이다. 지라시로 도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을 아무런 사실 확인 없이 대중에게 전달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가십(gossip)을 가려내야 할 기자가 오히려 가십을 생산하는 데 동참하고 있는 현실, 이 구역질 나는 상황에 대해 <오마이스타>의 김윤정 기자는 이렇게 일갈한다. '연예 뉴스도 '뉴스', 연예 기자도 '기자'라는 점을 잊지 말자.'고 말이다. 자조(自嘲)와 자성(自省)이 읽힌다. 업계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면서도 그 칼날을 자신에게도 겨누고 있는 고독한 외침이었다.


'연예'와 관련한 글을 주로 쓰다보니 아무래도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살필 때 '연예' 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소위 '연예 정보 프로그램'들도 제법 참고하는 편이다. '쓰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사실 '보고 읽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상당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괴상한(?) 글을 마주했을 경우에는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독자'라는 포지션이 그리 간단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그런데 최근에는 '연예' 면에 시선을 두는 게 참 힘들었다. 솔직히 짜증이 났고, 심지어 욕지기가 올라왔다. 


이래도 되나? 너무 심한 거 아닌가?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단순히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가 많다고 해서, 혹은 누군가에 대해 '비판적인' 뉘앙스를 띤 기사가 다수라고 해서 그 자체로부터 불쾌감을 느끼진 않는다. 그러한 기사를 쓰게 된 '근거'가 분명하고, 주장을 펼쳐 나가는 '논리'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설령 그것이 '사회적 상식'에서 약간 비켜서 있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부실한' 기반 위에서 '함부로' 휘갈겨진, 그런 '엇나간' 기사들이 도배될 때 우리는 극도의 피로감을 경험하게 된다. 



지난 13일 SBS <본격 연예 한밤>은 김소연 · 이상우의 비공개 결혼식을 소개했는데, '검문소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라는 설명과 함께 '이은형이 청첩장을 지참하지 않아서 돌아가야 했다'고 보도했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과 그 방송으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기사들을 접한 대중들은 '(김소연 · 이상우가) 유난을 떤다'며 눈총을 보냈다. 하지만 곧 밝혀진 '사실 관계'는 전혀 달랐다. 이은형은 애초에 결혼한 두 사람과 친분도 없었고, 따라서 청첩장을 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난 19일 채널A <풍문으로 들었쇼>는 '정유라'에 대한 '가십'을 다루면서 '연예계를 뒤흔든 문제적 금수저 스타'로 방송인(으로 활동했던) 에이미를 '지목'하며 각종 '설'들을 쏟아냈다. 패널로 출연하고 있는 '기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경로로 알게 됐는지도 밝히지 않은 온갖 풍문과 추측을 덧댔다. 굉장히 신난 듯한 분위기였다. 방송이라는 공공재를 통해 질 낮은 '뒷담화'가 공공연히 이뤄지는 참담한 장면이었다. 한 사람의 '인격'이 무참히 말살되는 순간, 당사자는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다. 



이뿐인가. 지난 21일부터 배우 '심은하'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고, 그와 관련한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를 가득 채웠다. 전날인 20일 심은하가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응급실로 이송됐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떠났던 90년대 최고의 스타의 근황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언론은 과도한 취재 경쟁을 펼치며 온갖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심지어 심은하의 남편인 지상욱 바른정당 의원의 사무실에 찾아가고, 집을 찾아가 이웃 주민에게 심은하를 본 적 있냐며 인터뷰를 해 방송에 내보내기도 했다.


언론과 기자들은 대중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는 그릇된 명분을 끌어안고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취재와 보도를 정당화하고 있다. 자신들의 '입'과 '펜'이 얼마나 무겁고, 또한 무서운 것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칼춤'을 추고 있는 듯 하다. 지난 25일, MBC <섹션TV 연예통신>은 송중기와 송혜교의 열애설에 대한 취재 내용을 전파로 내보냈는데, 굳이 당사자들이 부인했던 열애설을 발리까지 쫓아가서 그들이 묵었던 호텔 관계자를 인터뷰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면서 그 인터뷰 내용은 다음 주에 보도하겠다며 시청자들을 낚기까지 했다.


이쯤되면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범람이라 이름 붙여도 무방하리라. 연예 정보 프로그램들이 '보도'라는 이름으로 사실과 다른 소식들을 무분별하게 전하고, '기자'들이 팩트체크가 되지 않는 각종 풍문들을 마치 '진실'인양 이야기한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는 이를 받아적은 기사들이 쓰레기더미처럼 쌓여간다. 물론 우리는 저마다 알몸의 고디바 부인을 훔쳐봤던 피핑 톰(peeping tom)의 관음증적 욕망을 갖고 있다. 스타들의 삶이 궁금하고, 그들의 뒷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욕망이 '옳다'라고 말해선 곤란하다. 적절히 제어되고 조절돼야만 한다. 적어도 그 욕망이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놓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울타리를 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할 '언론'이 철없이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야 쓰겠는가. 다시 한번, '연예 뉴스도 '뉴스', 연예 기자도 '기자'라는 점을 잊지 말자'는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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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민망한 일이지만, 최근 영화관에서 깜빡 '조는' 일이 부쩍 늘었다.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일정한 리듬에 고개를 자연스레(?) 맡기는 것이다. 그래도 '코를 고는' 최악의 매너로 영화관을 경악으로 몰고가진 않았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혹시 잔잔한 영화 위주로 선택해 감상을 했냐고? 더욱 민망하게도, 실은 그렇지 않다. 놀라지 마시라. 무려 우리의 톰 아저씨(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미이라>를 보면서도 졸음을 이기지 못했으니.. 


나름대로 영화를 제법 많이 보는 편인데, 이 불가항력의 힘에 무릎을 꿇었던 경험은 극히 적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장르'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아무리 시끌벅적한 사운드와 액션이 쏟아져도 이야기 자체가 단조롭거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는 영화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또, 뻔한 '합'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의심)이 들면 지루함이 몰려온다. 액션과 이야기, 혹은 기존의 액션을 뛰어넘는 파격적 액션. 이 두 가지 특별함을 갖추지 못한 액션은 관객을 졸리게 만든다.



"올해 가장 놀라운 액션 시퀀스"(Quiet Earth)

"역동적인 액션 스릴러의 발견"(Screen daily)


분명 <악녀>는 달랐다. 감히 졸음이 찾아 올 틈이 없었다. 슈팅 게임을 연상케 하는 1인칭 오프닝 시퀀스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정보를 접한 상태였음에도) 가히 압도적이었다. 숙희(김옥빈)의 칼, 도끼, 총을 사용한 과감한 액션과 뒤이어 전개되는 맨몸 액션도 감탄스러웠다. 리허설만 2회차가 소요됐고, 촬영에 총 4일이 걸렸다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보였다. 제70회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분에 공식 초청된 이 영화를 향해 쏟아졌던 찬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었다. 


물론 초반의 경탄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프닝 스퀀스의 그 화려하고 강렬했던 숙희의 '죽임'에 대한 이유와 설명이 지나치게 빈약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숙희가 그토록 많은 살육을 저질러야만 했는가. 물론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실(?)하게 제시한다. 다만, 그 성실함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진부하다. '액션'에 있어서만큼은 기존의 틀을 깨는 데 성공했지만, 그 액션과 함께 빛나야 할 '이야기'에서는 틀 안에 갇힌 채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까.



숙희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조선족 출신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다. '보호자'이자 '울타리'였던 존재를 상실한 아픔, 그것도 '배신'에 의한 잔혹한 죽음은 뇌리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을 터. 숙희는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를 기다린다. 킬러인 중상(신하균)은 숙희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다. 중상으로부터 구제받고, 그로부터 훈련받고, 그로부터 길러진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또 다른 '전부'가 숙희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숙희는 중상과 결혼하게 되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날 끔찍하게도 남편을 잃는다. 그를 보호하던, 그의 전부였던 또 한 명의 '남자'를 잃어버린 트라우마는 숙희를 또 다시 어둠 속에 가두고 내팽개친다. 나락에 빠진 숙희를 끄집어올린 건 또 다른 '국가'라고 하는 또 다른 '남자'였다.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국가'가 갖고 있는 상징과 이미지가 어떤지 연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숙희는 국정원에 의해 살인 병기로 길러진다. 국가는 숙희의 '모성'을 이용해 그를 포섭하고, 그를 억압한다. 



자꾸 '숙희'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니까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속의 숙희가 떠오른다. <아가씨> 속의 숙희가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되바라짐을 마구 발산해 관객들에게 '청량감'을 줬던 것과 달리 <악녀> 속의 숙희는 체제 속에 철저히 종속된다.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스스럼없이 눈앞의 적을 죽여버리는 숙희지만, 그의 '액션'에는 주체성이 결여돼 있다. 정병길 감독이 <악녀>의 숙희를 두고 "나쁜 여자는 아니다. 착한 여자의 슬픈 이야기다"라고 말했던 건,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록 '여성 (원톱) 액션 영화'를 표방했지만, 그 타이틀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을 앞세운' 액션 영화라고 칭하는 게 맞지 않을까. 특히 숙희와 현수(성준)의 로맨스는 불필요하다 여겨질 만큼 '지루'해 순간 졸음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이는 또 다시 숙희를 우리에게 친숙한, 그래서 '옳다'고 여기는 '가족 형태'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마치 숙희에게 '남편'이 있어야만 '완전한' 가족이 되고, 또한 행복할 수 있다는 강박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김옥빈이 보여준 연기는 탁월하다 못해 경이롭다. 오토바이 장검 액션, 시내버스 안 액션 등 유려한 액션은 말할 것도 없고, 워낙 다양한 표정을 품고 있는 그의 얼굴은 쉽사리 잊히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피칠갑을 한 김옥빈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우리에게 이런 배우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인상적이다. 2009년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통해 '각성'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연기력은 JTBC <유나의 거리>(2014)를 통해 한층 성숙해졌고, 마침내 <악녀>를 통해 만개한 듯 보인다. 


<악녀>는 지난 22일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개봉한 지 15일 만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핸디캡을 안고 거둔 성과라 더욱 값지다. 또,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박스오피스에서 <하루>, <미이라>에 이어 4위를 기록하는 중이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매드맥스>와 <원더우먼>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내재하고 있는 영화에 '여성 액션 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뭔가 어색하다. 그렇지만, <악녀>가 거둔 기술적 성취와 그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김옥빈의 존재감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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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