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공허한 땅 위에 내린 흑임은 깊고 무거웠다. 그때 창조자는 ‘빛이 있으라’ 명했고, 세상은 낮과 밤으로 구분지어졌다. 정말 신이 ‘빛’을 창조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태양의 유무에 따라 삶을 살아왔다. 빛은 생활을 의미했고, 어둠은 수면을 뜻했다. 불이 사라지면 무력한 인간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닥불은 최소한의 방편일 뿐이었다.


어둠은 순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또, 극복의 대상이었다. 시야를 잃은 인간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어둠을 정복했다. 밤이 내린 도시는 더 이상 어둡지 않다. 흑암은 얕고 가볍다. 빛은 차고 넘친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신이 ‘낮의 도시’를 창조했다면, 인간은 ‘밤의 도시’를 창조한 셈이다. 


파리 에펠탑 


신의 창조물만 경이로운 건 아니었다. 2016년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간 후 넋을 잃었고, 인간의 발명품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불빛 따위가 뭐가 멋있다고 야단법석이야’라고 무시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서울이나 도쿄, 홍콩의 야경(도 감탄을 자아냈지만)과는 다른 ‘낭만’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불빛이 아니었다. 대도시의 야경의 온도가 차갑기만 하다면, 파리의 그것은 따뜻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터키 이스탄불, 벨기에 브뤼셀을 여행하면서 그 생각은 확고해졌다. 낮의 도시와 밤의 도시는 확연히 달랐고, 그 차이를 경험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야경은 여행의 꽃이었고, 은은함을 간직한 유럽 도시들의 밤은 특히 아름다웠다. 밤의 도시를 둘러보고, 그 야경을 감상하는 건 여행 일정 중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프라하의 야경 


부다페스트의 야경 


그동안의 여행지 가운데 ‘밤의 도시’가 가장 낭만적이었던 곳을 꼽으라면 역시 파리와 프라하, 부다페스트가 삼대장이다. 더 이상 순위를 매기는 건 불가능한데, 세 곳은 그마다 분명한 특색이 있었다. 파리는 ‘에펠탑’ 때문인지 몰라도 강렬하면서 낭만적인 느낌이었고, 프라하는 프라하성과 카를교의 조명 때문에 은은하고 감미로웠다. 부다페스트는 발광하는 국회의사당의 풍족한 빛 때문에 풍만감을 줬다. 


한편, 브뤼셀의 야경도 그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냈다.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이어 마그리트 미술관까지 빠르게 둘러봤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18:00까지 개관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파리와 몽생미셸에서도 경험했다시피 하절기의 유럽은 해가 늦게 진다. 늦어도 너무 늦다. 오후 10시가 지나야 겨우 어둑어둑해진다. 맙소사!


늦은 일몰 시각은 여행자의 입장에서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고생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여행 일정을 넉넉하게 짤 수 있다는 점에서 여유로웠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어두워지지 않자 오히려 당황스러워졌다. 시간을 보내고 또 보내도, 아직 밖은 밝기만 했다. 여행에서 마지막 일정은 대개 야경을 보는 것으로 마감하기 마련인데, 밤이 되지 않으니 난감했다. 체력은 고갈돼 갔고, 결국 버티기 모드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브뤼셀의 경우에는 숙소와 '(야경을 봐야 할 장소인) 그랑플라스'가 도보로 5~10분 거리였다. 그 말인즉슨 재정비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우선, 벨기에로 떠나기 전에 미리 검색해뒀던 맛집 '르 비스트로(Le Bistro), Porte de Hal Boulevard de Waterloo 138, 1000 Bruxelles'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왕립 미술관에서 애매하게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워 택시를 탔다.


식당 1층은 벌써부터 사람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남은 자리도 대부분 예약석이라 2층으로 안내 받았다. 안내를 하던 직원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잔뜩 흐리고 차가운 날씨 덕에 굳어있던 얼굴이 덕분에 한결 편해졌다. 메뉴판을 받아들었지만, 차분히 단어를 번역해가며 주문을 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인터넷으로 사진을 검색해 홍합탕을 보여주고, 파스타는 감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감자튀김도 빼베드포드 호텔놓을 수 없었다. 홍합은 벨기에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꼭 먹어보고 싶었다. 또, 싸늘한 날씨에 위축된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감자튀김(프렌치 프라이)는 그 이름 때문에 프랑스가 원조라 알려져 있지만, 벨기에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들여왔다는 설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그들만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벨기에의 감자튀김을 워낙 높이 쳐주는 터라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홍합탕은 C, 파스타는 B, 감자튀김은 A였다. 홍합탕은 좀 짠 편이었는데, 해감의 문제인지 짠맛을 강조하는 유럽식 조리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국물이 따뜻하긴 했지만, 그 음식을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감자튀김은 확실히 달랐다. 풍성한 식감이 우리네 것과는 차이가 뚜렷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숙소(베드포드 호텔, Bedford Hotel)로 돌아왔다. 소화도 시킬 겸 브뤼셀 시내를 걸었는데, 방안으로 들어오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 7시나 됐을까. 아직 해가 지려면 3시간이나 남아 있으니,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뒤척이기라도 했을 텐데,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단계였다. 여행은 숙면과 동의어라 해도 틀릴 게 없다.





얼마나 잤을까. 알람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커튼은 젖혀 시야를 확보했다. '와, 드디어 밤이구나!' 빛이 사라져 있었다. 브뤼셀의 밤은 어떨지 궁금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그랑플라스로 가는 길은 조금 음침했지만, 점차 강렬한 빛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을 뗐을 때,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동반사와 같은 감탄이었다.


밤의 그랑플라스는, 밤의 브뤼셀은, 밤의 벨기에는 낮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건물들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광장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마치 빛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발광(發光)하고 있다고 할까. 찬란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분명했다.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광장은 사람들의 반응까지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그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웃으며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양인이 신기했던 걸까. 그들은 자신들이 '안도라'라는 나라에서 왔다며 그곳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고, 그들은 또 한번 신기해 했다. 그리고 이내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았다. 눈 속에, 발걸음 속에 차곡차곡 기억하고 싶었다. 그랑플라스의 풍만한 빛이 주는 느낌은 그 전에 봐왔던 야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밤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이 창조한 '밤의 도시'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