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혹성탈출: 종의 전쟁>의 질문에 유발 하라리는 어떻게 대답할까?

너의길을가라 2017. 8. 1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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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로드무비, 전쟁영화, 웨스턴 영화, 대서사적 어드벤처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리더 시저의 정서에 대한 탐색이 자리한다
" (제작자 딜런 클라크)


20년 전, 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은 유전자 치료제 ALZ-112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존 리스고)를 위한 치료약이었다. 결과의 안전성을 확보해야 했던 월은 임상 시험에서 유인원을 이용했고, 그 과정에서 부작용으로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을 지닌 시저(앤디 서키스)가 탄생하게 된다. 인간에게 길러진 시저는 인간에 대한 유대를 바탕으로 신뢰를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종)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인원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그들만의 사회를 구성한다.


그로부터 5년 뒤, 과학 실험의 실패로 인해 '시미안 플루'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유포돼 인간의 대다수가 죽어 나간다. 이로써 인간은 사실상 멸종의 단계에 진입한다. 반면, 유인원은 진화를 이어가며 점차 발달하는데, 짧은 기간 내에 놀라울 만큼 인간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멸종 위기에 처한 인간들은 유인원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전쟁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호전적인 유인원 코바(토비 켑벨)를 필두로 반격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그야말로 처절한 종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진화의 시작(2011)'과 '반격의 서막(2014)'를 잇는 <혹성탈출> 프리퀄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시기적으로 따지면, '반격의 서막'을 열었던 코바 체제로부터 2년 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인원의 진화와 인간의 퇴화는 더욱 선명해졌다. 겨우 살아남은 인간들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등 퇴화를 거듭한다. 유인원의 자신감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유인원에 의해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공포가 점점 커져가는 것이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어느 편에 서 있는가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인류 문명의 파괴를 지켜보는 일부 관객에겐 희망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대령이 악인이 아닌, 꼭 필요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느꼈다" (우디 해럴슨)


특수 부대 대령(우디 해럴슨)은 유인원을 적대시하는 가장 극단적인 캐릭터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가 혼재된 상태에서 유인원을 전멸시키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다.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저는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려 애쓴다. 동료들이 희생당한 후에도 포로들을 풀어주는 등 관용을 베풀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대령은 시저의 뜻을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다. 유인원의 증가는 곧 인간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령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시저는 대령을 죽이기 위한 자신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관객들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작게는 개인적인 분노와 리더로서의 역할 사이의 갈등에 대해 묻고, 크게는 인간(사피엔스)의 자격과 조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인간의 공격에 맞서 유인원 사회를 이끌어야 할 시저는 가족에 대한 복수를 위해 개인적인 싸움에 돌입한다. 그 누구보다 냉철했던 그는 증오심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의 모습은 '코바'나 '대령'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과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은 그 반대편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노바(어마이어 밀러)'라는 인간 소녀와 그를 지켜주기 위해 손을 내민 유인원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인간은 과연 다른 어떤 종들보다 우월하고 위대한 존재일까. 그건 혹시 착각이 아닐까.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유인원'을 통해 인간만의 것이라 여겼 지능과 언어, 고차원적 문화 등이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유인원의 경계를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모호하게 그려낸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더욱 강렬하게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묻고 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유인원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희망'을 던져주고 싶지만, 사실 그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아마도 그건 성사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라면서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5만 년 전 공존했던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가운데 사피엔스만 남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라 단언한다. 그것이 사피엔스가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이든 아니면 자원을 둘러싼 경쟁 때문이든 간에 말이다. 지난 1만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호모 사피엔스는 유일한 인간의 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가능성에 대해 매우 폐쇄적이지만, <혹성탈출> 시리즈는 그에 대해 열린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물론 공존의 가능성은 부정적이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전멸시킨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우리가 무시하기에는 너무 친숙하고 관용하기에는 너무 달랐다는 것."


아마도 유발 하라리의 저 추측이야말로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그려진 인간과 유인원 간에 벌어진 전쟁의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의 지배자였던 인간의 입장에서 유인원은 너무 친숙하면서 너무 다른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노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뜨거운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과 유인원의 전쟁, 그리고 혹한의 계절 속에서 피어난 '노바'라는 꽃은 '종'을 떠나서 모두가 지켜내고자 했던 '인류의 희망'이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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