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화창한 날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비가 조금 내려도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가볍게 뒤집어버리는 강풍이 불어닥쳤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려웠다. 부디 다음 날 아침에는 잠잠해지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가 커튼부터 젖혔다. 물기를 머금은 자동차 바퀴소리가 불길했지만, 도로 위에 남아있는 빗물이길 바랐다. 


아, 이럴수가.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고집스러웠다.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오스트리아 빈에 머무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만약 여행 일정에 여유가 (엄청) 많았다면, 인천 공항에서 사왔던 책을 들고 카페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독서를 하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언제나 여행자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원래 계획에 있었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도 흥미를 잃었다. 고작 1시간 거리에 있는 그곳의 날씨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이 빠졌다. 빈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위주로 일정을 짤 것인가, 비가 오더라도 브라티슬라바로 갈 것인가.. 순간 번뜩하고 제3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참에 아예 먼 곳으로 가볼까? 


부다페스트 역 내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비를 피할 수 있을 테고, 먼 거리를 이동하면 날씨가 바뀌거나 이동하는 시간 동안 비구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기특하기도 하지. 당장 구글 지도를 보면서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음, 음, 음.. 여기 있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 지나치게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그 곳. 3시간 정도면 적당하다 싶었다. 


부다페스트 역 외부 



"오길 정말 잘했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했던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여행에서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부다페스트의 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만들어 낸 풍경들이 경탄스러웠다. 놀라지 마시라. 하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졌다. 동유럽의 새파란 하늘을 만끽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대견함은 뿌듯함으로 진화했고,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잠시 쾌적한 부다페스트 거리를 걷다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동했다. 계획은 이랬다. 우선, 부다페스트를 가로질러 흐르는 도나우 강(Donau, 독일 남부에서 시작된 이 강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에 이르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으로 이어진다)과 강변에 세워진 국회의사당 등 주변(페스트 지역) 풍경을 감상하고, '부다 왕궁(Budavári Palota)'에 올라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ösök Tere)'를 비롯해 도심을 전반적으로 둘러보고, 저녁 무렵 '아경'을 보기 위해 다시 '부다 왕궁'에 오르기로 했다. 동선으로 보면 중복이라 비효율적이라 할 수 있지만, 도나우 강과 그 주변의 풍경을 낮과 밤, 중복으로 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날씨가 좋았다. 또, 부다 왕궁의 낮과 밤도 궁금했다. 인공적인 빛이 발산하는 아름다움도 매력적이지만, '햇빛'이라는 천연 조명의 깊은 맛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국회의사당


Calvinist Church


2호선을 타고 Keleti pályadvar 역을 출발해 Batthyány tér 역까지 이동했다. 지상으로 나오자 입이 떡 벌어졌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푸른 하늘이 그림처럼 빛났다. "이야, 진짜 오길 잘했다" 정말이지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걸으며 부다페스트의 낭만에 빠져들었다. 마냥 걷기만 해도 행복감이 솟구쳤다. 계획에 없던 즉흥성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자 쾌감은 더욱 커졌다. 


파리를 여행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트램(Tram)이 도심 외각에서만 운행을 하고 있어 굳이 탈 일이 없었다. 하지만 체코 · 드레스덴 · 빈에서는 그 활용도가 훨씬 커졌다. 부다페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버스는 노선이 복잡해 이용하기 어려운데, 트램은 훨씬 간단했다. 또, 애초부터 24시간 권(1,650 포린트 = 약 6,800원)을 끊어두었으니 대중교통을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부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트램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믿을 건 두 다리뿐,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19번과 41번 중 빨리 오는 트램을 타고 Batthyány tér 역과 부다 왕궁을 왕복했고, 다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Deák Ferenc tér 역까지 이동한 후 1호선으로 환승해 Hösök Tere 역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일들이 점차 익숙해는 게 느껴졌다. 여행지의 대중교통을 헤매지 않고, 제법 능숙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랄까.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회쇠크 광장)은 헝가리의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인데, 그 좌우에 부다페스트 미술관과 또 다른 미술관인 뮈처르노크가 위치해 있다. 광장 중앙에 있는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의 기념비는 그 높이가 36m에 달하고, 헝가리 민족의 수호신인 천사 가브리엘이 날개를 편 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기념비 아래에 아르파드(Árpád, 845년 경-907년 경)를 비롯한 헝가리 민족 초기 부족장 7명의 기마상이 있고, 기념비 양 옆으로 헝가리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 14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미욱한 중생이 헝가리의 역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저 푸르스름한 동상과 한없이 푸르른 하늘의 '깔맞춤'에 감탄을 한 후 서둘러 뒤편의 공원으로 이동할 밖에.


버이더후녀드 성






영어로 'City Park'라는 뜻의 시립 공원(Városliget)은 제법 규모가 컸다. 공원 내부에 동물원과 세체니 온천, 버이더후녀드 성(Vajdahunyad vára) 등이 있었고, 호수와 인공 분수 주변에는 휴식 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부다페스트의 시민들이 찾고, 많은 여행객들이 머무는 장소답게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왠지 모르게 동화 속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호수의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담뿍 맞으며 여유를 즐겼다.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다. 지도를 보면서 다음 동선을 머릿 속으로 그렸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선,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가서 부다페스트만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Corvin Mozi'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도 가보기로 하자. 








도심의 중앙부는 활력이 넘쳤다. '동유럽', 특히 '헝가리'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노후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었다. 패션 거리의 'C&A'라는 의류점 앞에서 만난 '브레이킹 댄스'는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그곳은 젊고, 힘차고, 에너지가 넘쳤다. 다만, 영화관은 생각보다 소박했는데, 예스러운 분위기가 남아 있어 멀티플렉스가 휩쓸기 전의 영화관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람쥐마냥 재빠르게 돌아다녔지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입장 시간이 지난 뒤라 건물 밖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서야 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됐다. 부다페스트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를 만나러 갈 타이밍이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두 다리는 한껏 지쳐 있었지만,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녹초가 된 두 다리도 살려내는 법이다.


아래의 사진은 부다 왕궁에서 내려다 본 부다페스트의 야경이다. 이 글을 읽어준 당신에게 보내는 아주 작은 선물이다. 비록 부족한 사진이지만, 마음껏 감상하길.. 마음껏 빠져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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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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