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킹 아서>에서 '문재인'이 보이는 건 왜 일까?

너의길을가라 2017. 5. 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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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찰리 헌냄)가 성검(聖劍) 엑스칼리버(Excalibur)를 뽑는 건 '운명'이었다. 보티건 (주드 로)의 보호를 받고 있던 바이킹과 마찰을 빚으면서 쫓기는 처지가 된 아서는 체포를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하지만 운명의 굴레는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엑스칼리버를 뽑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다는 표식이 없는 아서는 검 앞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한다. 검을 뽑아야 하는, 그래서 왕이 되어야 하는 운명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는 건 '운명'이었다. 바위가 된 우서 왕(에릭 바나)의 등에 꽂힌 검을 그의 아들인 아서가 뽑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우서 왕과 그의 '혈통'만이 그 검을 사용할 자격이 있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형을 죽이고 권좌를 탈취한 보티건에 맞서는 것,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공포'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보티건의 극악무도한 폭정을 멈추고 새로운 왕이 되는 것도 아서의 운명이었다. 



백성들은 누구도 뽑지 못했던 엑스칼리버를 뽑아 든 아서를 추앙하기 시작한다. 암흑과도 같은 보티건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영웅으로 여기고 그의 이름을 연호한다. 갑자기 너무 큰 기대의 중심에 서게 된 아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둬!' 처음에는 부정하려 했다. 외면하고 피하려 했다. 양손으로 검을 쥘 때마다 끔찍한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매일 밤마다 악몽으로 다가왔던 그 견디기 힘든 슬픔과 아픔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운명은 가혹했고, 운명을 감당할 힘을 기르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강 속으로 검을 던져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운명은 더욱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보티건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킹 아서> 속의 '아서'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같은 이름을 떠올렸을 것이라 짐작한다. 지금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된 사람, 공교롭게도 『운명』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던 사람, 바로 '문재인' 말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문재인은 자신이 쓴 책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겼다. 이때 그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노무현의 '운명'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혼자 외로울까봐" 청와대로 들어가 초대 민정수석과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던 그였지만, 한사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는 것은 거부했다. 그랬던 문재인을 정치라는 잔혹한 무대의 한복판에 끌어들였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2009년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그가 '내 생에 가장 긴 하루였'다고 회상했던..


영결식을 찾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향해 "정치 보복'이라고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적개심과 분노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 상황을 정리한 사람이 바로 당시 상주를 맡았던 문재인이었다. 예를 갖추고 머리를 숙여 사과를 하는 그의 성숙한 모습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얼얼함을 남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에 깊은 위로를 받았고, 문재인을 새로운 '희망'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라면 노무현의 운명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리라.


쉽지 않았다. 정치라는 게 어디 그리 만만한 것이던가. '권력 의지가 없다'는 비판은 꼬리표처럼 달라 붙었다. '등이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정치를 시작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2012년의 실패는 뼈아팠다. 어찌 보면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그의 '혈육'을 통해 재현되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또 한번 대한민국을 뿌리채 뒤흔들었다. 그 결과는 '촛불'로 이어졌고, 박근혜는 탄핵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사실 <킹 아서>를 통해 '문재인'을 떠올리게 되는 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6세기 웨일스의 전설과 신화, 우서 왕의 아들인 아서만이 '엑스칼리버'를 뽑을 수 있고, 그 '혈통'만이 진정한 왕위의 승계자라는 건 '누구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밀어내야 할 유산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박정희의 '딸'이라는 후광 효과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가 되는 안타까운 사례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후진적 발상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은 노무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문재인을 노무현에 가둬서는 안 된다. 아서는 보티건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에 오른 후, 그의 아버지 우서의 '그림자'를 좇지 않았다. 오히려 '원탁'을 만들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다. 그 원탁에는 여러 의견을 가진 기사들이 둘러 앉게 될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자신의 의견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피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서 왕은 아서의 시대를 열었다. 19대 대통령 문재인도 그러하길 바란다. 


'누군가의' 운명을 이어받기보다 '자신만의' 운명을 걸어나가길 희망한다. 그를 지지하는(지키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그러하길 바란다. 그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게 되길 바란다. 아서의 시대에는 '혈통'과 '운명'이 삶을 결정했을지라도, 우리가 사는 지금은 다르다. 문재인이 뽑은 '엑스칼리버'는 '(정치적) 혈통'에 의해 결정된 '운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민의' 그 자체였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거기에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의(意)'가 담겨 있음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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