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정. 그의 이름 세 글자를 외우게 된 건, 지난 2013년 한 예능 방송을 통해서였다. KBS2 <가족의 품격-풀하우스>에 출연했던 그는 "조기영 작가와 결혼했는데, 시인과 결혼하면 돈 벌이가 없지 않냐?"는 이경규의 물음에 "네, 없어요. 하지만 KBS에서 받은 월급으로 집도 사고 저금도 한다"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드는 생각은 물질에 끌려 다니지 말자는 것이다. 명품 가방 100만 원짜리를 하나 사느니, 10만 원짜리 10개를 사서 들고 다니는 게 더 행복할 것 같다"며 자신의 인생관과 행복론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저함 없는 그 단단한 생각들을 듣는 순간, 그(와 그의 남편)가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여럼풋이나마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이름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다음 날, 황색 언론들은 고민정 아나운서의 '말' 중에서 '남편이 돈벌이가 없다'는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춰 기사들을 쏟아냈다. 자극적인 기사로만 내용을 접한 대중들은 고민정 아나운서를 향해 '안쓰럽다'는 반응을 보냈다. 




아무래도 재미를 위주로 편집이 될 수밖에 없는 '예능'이라는 방송의 생리, 그리고 자극적인 내용만 골라 가위질한 뒤 덕지덕지 살을 붙이는 황색 저널리즘의 생리가 만들어 낸 몹쓸 풍경이었다. 또, 여전히 '남편=가장(家長)'이라는 부계제의 관습이 뭇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가장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사회에서 고민정 아나운서의 조금 생경한 이야기는 흥미로운 안줏거리마냥 이리저리 씹히고 돌아 다녔다. 


이런 상황이 당혹스러웠던 고민정 아나운서는 "가슴이 너무 아프다. 내가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걸까, 내가 너무 민감한걸까. 내 월급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말. 물론 내가 한 말이지만 앞뒤 문맥 없이 그 부분만 따서 기사 제목으로 만드니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이 되버렸다"며 자신의 블로그에 심경을 담은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을 통해 좀더 분명히 고민정 아나운서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됐고, 그에 대해 가졌던 첫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됐다.


"꿈이 없던 내게 아나운서라는 꿈을 제시해줬고 순간순간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언론인이 될 수 있도록 지금의 고민정을 만들어준 사람이 남편이다. 그런데 마치 난 소녀가장이고 남편은 무능력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 같아 잠이 오지 않는다. 난 지금껏 남편이 작가로서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쓰는 걸 반대해왔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방송을 하는 게 아니듯 돈을 벌기 위해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경제활동을 반대한 건 나인데. 꿈도, 미래도 없던 대학생인 내게 아나운서라는 꿈을 제시해줬고 헌신적으로 도움을 줬던 사람은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아무도 내게 아나운서의 가능성을 찾아보지 못했을 때 그걸 발견해줬고 말솜씨도 글재주도 없던 내게 꾸준히 옆에서 선생님 역할을 해줬다. 아나운서가 된 후에도 그저 웃음만 주는 사람이 아닌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옳은 소리를 해준 것도 그 사람이다. 아무런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백지 위에 작게나마 지금의 나란 사람을 그려준 것 또한 그 사람인데 지난 15년 동안 그렇게 나를 빛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빛도 나지 않은 역할을 해왔는데 한 순간에 아내에게 모든 짐을 전가하는 무책임한 남편이 돼버린 것 같아 속상하다. 그것도 나로 인해."


다소 긴 내용이지만 전문을 인용한 까닭은 이 글 안에 고민정과 조기영 시인의 삶과 태도가 고스란히 적혀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작가로서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쓰는 걸 반대"했고, "가 돈을 벌기 위해 방송을 하는 게 아니"라고 대목은 두 사람이 '돈'이라고 하는 굴레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좇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줬다. 또, "꿈도, 미래도 없던 대학생인 내게 아나운서라는 꿈을 제시해줬고 헌신적으로 도움을 줬던 사람은 바로 지금의 남편"이라는 부분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이상적인 '(부부) 관계'를 보여줬다.


고민정의 글은 상당히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오해'를 하고 있던 대중들은 진심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이후에 두 사람은 방송을 통해 얼굴을 비췄다. 2014년 방송된 KBS1 <리얼체험 세상을 품다>에서 대한적십자사와 함께 네팔로 여행을 떠나 현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2015년에는 KBS2 <결혼이야기>에서 자신들의 결혼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려주기도 했다. 다른 부부들처럼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위기를 딛고 일어서고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치지 않겠습니다. 지금의 절박한 그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고민정 아나운서)


그리고 잠시 잊혔던 그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깜짝 놀랐다. 다름 아니라 유력 대선후보 중 한 명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선거 캠프에 합류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난 4일 문재인 전 대표 측은 공식 블로그에 "KBS 간판 아나운서 출신 고민정 씨가 문재인 전 대표를 도와 정권교체에 힘을 보태겠다고 뜻을 밝혔다"는 글을 게시했다. 아니, 난데 없이 '정치'에 발을 내딛겠다니. 무슨 이유에서 였을까. 안정적인 직장인 KBS를 버리고(?) 거친 황무지로 나가다니!


이유는 다름아니라 '언론 자유'였다. 지난 MB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KBS는 그야말로 처참히 무너졌다. 공영방송이라고 하는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고, 권력에 무릎꿇고 하수인 역할을 자처했다. 이른바 '청와대 비호방송'이라는 조롱까지 들어야 했고,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전국언론노조 성재호 KBS 본부장은 "KBS내부에는 수많은 (청와대발) 언론부역자들이 있다. 이는 청와대발 낙하산 사장들이 KBS로 내려오기 때문"이라며 언론장악방지법을 국회에서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민정 아나운서가 오랫동안 몸을 담아왔던 KBS에서 퇴사하고, '정치'에 입문하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KBS의 사정과 결코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앞서 인용했던 고민정 아나운서의 글에서 놓쳤던, 중요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아나운서가 된 후에도 그저 웃음만 주는 사람이 아닌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옳은 소리를 해준 것도 그 사람" 그렇다.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 고민정 아나운서는 KBS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KBS를 지키는 선택을 한 것이다.




"2012년 대선 결과가 나온 날 아침, 당신은 눈물을 쏟으며 출근했었지. 방송국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5년을 참아왔는데 5년을 다시 견뎌야 한다니 막막했겠지. 시끄럽고 불편하며 낯설기까지 한 전투를 각오해야 하는 현실 참여에 당신이 흔들린 걸 보면 당신에겐 세상을 바꿔보고자 했던 학생 때의 열정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나 보오."


그의 남편인 조기영 시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당신을 문재인에게 보내며"라는 글을 공개했다. "아, 이걸로 아내를 뺏기는구나. 이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 싶다. 꽃길만은 아닐 그 길에 당신의 건투를 비오."라는 당부로 갈무리한 그 편지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또, 고민정 아나운서의 고민과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소신있는 삶을 살아왔던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 부디 그가, 그 책임감을 지켜내길 기대한다. 망가진 방송국을, 국민의 방송국으로 되돌리는 데 역할을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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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