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걷기왕>이 건네는 위로, "조금 늦어도 괜찮아. 헤매도 괜찮아"

너의길을가라 2016. 10. 2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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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심은경)은 지극히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친구와 함께 먹는 떡볶이가 가장 맛있고,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아직' 이렇다할 꿈도 없다.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만복은 매사에 느긋하고 천진난만하다. 그 어수룩한 모습들이 '어른'들을 마뜩지 않다. '빨리 꿈을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선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 오히려 조급해지는 건 어른이고, 그래서 소의 고삐를 끌듯이 어디로든 데려가고 싶어진다. 


세심한 담임선생님(김새벽)은 만복에게 '선천적 멀미증후군'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어떤 교통수단도 이용할 수 없는 만복이 매일 왕복 4시간 거리의 학교를 걸어서 등교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그에게 '경보(競步)'를 권한다. 꿈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제자에게 특기를 살린 진로상담을 해준 담임은 매우 만족스럽다. 어른의 몫을 한 것만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만복은 경보가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한번 해보기로 한다. 



"만복아, 중요한 거 뭐다? 꿈을 향한 열정과 절실함이야!


『꿈과 열정, 가난을 이긴 성공의 비결』이라는 책에 빠진 담임은 만복에게 끊임없이 자기계발서의 '비결'을 외친다. 하지만 만복은 육상부에 들어가서도 태평한 성격대로 어슬렁 거린다. 공부는 하기 싫은데 운동은 쉬워 보였다. '예체능'이라 수업시간에 터치받지 않고 마음껏 잘 수 있었고, '육상부'라는 타이틀은 뭔가 있어 보였다. 공무원이 되겠다는 짝꿍(김지원)이나 다른 친구들처럼 '나도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이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했다. 


'꿈'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육상부 선배 수지(박주희)는 그런 만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부상도 정신력으로 이겨내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는 수지에게 만복은 대충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간절함이 없는 그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전국체전 예선에 출전했던 만복이 '멀미'의 여파로 결국 실격해 탈락하자 '의지도 없고 쓸모도 없'다며 모진 말을 쏟아낸다. 이를 우연히 듣게 된 만복은 깊은 상처를 입고 경보를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노력에는 끝이 없는 거야."

"모든 건 정신력의 문제야."


잡고 있던 '끈'을 놓쳐버린 만복은 의욕 없는 하루를 보낸다. 방황하는 그를 보고 '어른'들은 태도를 지적한다. 어느 순간, 주변을 돌아본 만복은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친구들은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자신만 멈춰서 있다는 생각이 엄습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다시 육상부를 찾아간다. 그런 만복의 모습에서 수지는 두려움 때문에 부상을 숨긴 채 경보에 매달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만복의 둘도 없는 조력자가 된다. 


운 좋게 전국체전에 출전할 수 있게 된 만복은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못 이기고 '오버 페이스'를 하게 된다. 경쟁이 주는 부담감이었을까? 선두 경쟁을 펼치던 만복은 다른 선수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사람들은 만복에게 빨리 일어나서 달리라고 소리친다. 그 순간, 만복은 깨닫게 된다. "나, 왜 이렇게 빨리 달렸을까. 조금 늦어도 괜찮을지 않을까" 아, 만복에게 찾아온 깨달음은 고스란히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계속 달릴 거예요?"

"아니요"


일어서서 계속 달리기를 권하는 '어른'에게 만복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아니'라 말한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다. 만복이 1등을 하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적어도 '완주'를 해내는 짠한 이야기로 진행될 것만 같았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어찌됐든 최선을 다하면 된 거야' 정도의 답을 주리라는 예상은 산산조각났다. 오히려 '왜 그래야 돼?'라고 반문한다. 상쾌하고 기분 좋은 '반전(이라 생각지 않겠지만)'이다.


<걷기왕>은 기존의 상식적인 문법을 완전히 뛰어넘는 영화다. 꿈을 가지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또, 넘어지는 것을 실패라고 단정짓지도 않는다. "힘내!"라고 독촉하지도 않는다. "달리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걷고 싶으면 걸어도 좋아. 빨리 걸을 필요도 없어. 천천히, 조금 늦어도 괜찮아"라고 말한다. 지치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게 와닿을 것이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아기자기하고 담백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뻔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심은경의 연기에 대한 반응도 극과 극으로 나뉠 텐데,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었다는 호평의 반대편에 기존 연기 스타일의 반복이라는 비판이 자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육상에는 코스가 있지만, 인생에는 코스가 없다. 아이들을 거친 광야에서 헤맬 수 있도록 내버려둬야 한다"는 메시지가 주는 울림이 워낙 반갑다. 


<걷기왕>을 보고 난 후, 문득 잊고 있었던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힘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힘내라는 격려의 말을 기대하고 있니? 그건 지금의 네게는 역효과야. '힘내라, 열심히 살아라'라고 격려하는 소리들만 넘치는 세상, 이제 사람들은 그런 말로는 참된 힘이 솟지 않아. 나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 싶어.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너무 힘을 내려고 애쓰는 바람에 네가 엉뚱한 길, 잘못된 세계로 빠져드는 것만 같아. 굳이 힘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잖니? 인간이란 실은 그렇게 힘을 내세 살 이유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거꾸로 힘이 나지. 몹쓸 사람들은 우리에게 지나치게 부담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야. 힘을 내지 않아도 좋아. 자기 속도에 맞춰 그저 한발 한발 나아가면 되는 거야. 


- 츠지 히토나리, 『사랑을 주세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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