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감히'의 사회학] "네가 감히?", 대한민국에 드리운 권위주의

너의길을가라 2016. 10. 8.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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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히

① 두려움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자신의 신분이나 능력 따위를 넘어서서 주제넘게.


"김제동이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군 간부 문화를 정말 희롱하고 조롱한 것으로 군에 대한 신뢰를 굉장히 실추시키고 있다"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



촌극(寸劇). 그 이상 적합한 단어를 찾기 어렵다. 어휘력의 부족을 탓해야 할까? 새누리당의 백승주 의원은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방송인 김제동이 JTBC <김제동 톡투유 - 걱정말아요 그대>에서 이야기했던 '영창 에피소드'를 문제 삼았고, 급기야 김제동의 우스갯소리는 '군(軍)에 대한 모독'으로 비화됐다. 김제동은 '감당할 수 있으면 부르라'고 당당히 외쳤고, 국방위 김영우 위원장은 '증인 불채택 방침'을 밝히면서도 김제동에게 사죄를 요구했다. '감당할 수 없어서' 못 부른 꼴이 됐지만, '권위'는 챙기겠다는 것일까. 


과연 김제동은 '군'을 모독했는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발언'을 하는 김제동의 거침없음은 누군가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 반응의 기저에는 두 번째 의미의 '감히'가 자리잡고 있는 듯 하다. 이를테면,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방송인 주제에 '감히' 함부로 떠들어? 정신 차리게 혼쭐을 내줄까'와 같은 것이다. 이른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해 취하는 전형적인 태도다. 신분제가 공고했던 조선시대로 돌아가면, '한낱 백성 주제에 감히?', '노비 주제에 감히?' 정도일 게다. 



신분제가 표면적으로는 해체됐지만, 그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겠는가. 애석하게도 DNA 속에 내재된 그 수직적 사고방식은 사회 속에 체화된 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특정한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우위에 두고 생각하고, 상대방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못된 버릇이 생겨버렸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잘못된 표어는 '감히 손님한테?'라는 반응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라면 상무'의 갑질에 분노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작은' 갑질엔 무신경한 사람들 틈에 숨어 있진 않은가?


경기도 안성의 어느 중소기업의 간부는 주말수당을 받지 못했다고 고용노동부에 신고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폭행했다. '외국인 노동자 주제에 감히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전주시에 살고 있는 60대 남성은 단골 막걸리집에서 자주 마주친 한 남성에게 "같이 술을 먹자"는 제안을 했다가 거절 당하자 그를 도로에 밀어 넘으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 '감히 네가 나를 무시해?' 충남 청양의 한 고등학교에선 고3인 A군이 후배가 SNS에 반말로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1시간 넘게 폭행을 하기도 했다. '후배 주제에 감히?'




광주에선 아파트 입주민인 50대 남성이 큰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면 다른 입주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말한 아파트 경비원의 뺨을 담뱃불로 지진 사례도 있었다. '경비원 따위가 감히?'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는 여학생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이를 따져 묻는 경비원에게 "내가 이 학교 교수인데 여학생 기숙사에 들어온 게 잘못 됐냐. 넌 개 값도 안 돼서 못 때려"라는 천박한 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이 발생할 수 있는 이유를 '감히'라는 한 단어로 표현해도 무방하다. 이건 어휘력의 한계가 아니다. 


너도나도 '감히'를 입에 담는다. 경제적 부(富)를 '신분'의 척도라 여기는 재벌가의 횡포는 천민자본주의가 판치는 시대 속에서 감내해야 할 몫이라지만, 국민을 섬겨야 할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윗사람'으로 여기고, 되려 국민들을 '아랫 것'으로 대하는 태도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19대 국회에 입성했던 운동권 출신의 한 국회의원은 “내가 왜 질의서를 (국회 본청까지) 들고 가야 하냐!"며 서류뭉치를 보좌관에게 던지며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 꼴사나운 권위주의 문화의 정점에는 '대통령'이라고 하는 선출직 공무원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보수 정권의 '대통령'들은 걸핏하면 국민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대통령 모독'했다고 위협을 가하곤 한다. 이명박 정부는 G20 정상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려 넣은 대학 강사를 처벌하는 데 열을 올렸고, 결국 국민들로부터 풍자의 자유를 빼앗아 버렸다. 또, 자신의 트위터에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게시한 군인을 기소하면서 '상관모욕죄'를 적용하기도 했다. '감히 국가 원수를 모욕해?'라는 식이다. 그렇게 표현의 자유마저 앗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예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그 도를 넘고 있다( 2014년 9월 16일 )"며 국민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다. 검찰은 대통령의 발언이 있은 지 이틀 만에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 수사팀을 꾸려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다. 국민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꼴이 아닌가. 그야말로 '제왕'으로 군림하는 대통령의 안중에 '국민'이 있을 턱이 없다. 이쯤되면 '최고 존엄을 건드렸다'는 북한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한번 조성된 공포 분위기는 사람들을 위축시킨다.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한다. '감히'를 외치며 상대방을 내려찍으려는 오만방자한 태도, 그 권위주의적 태도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열설적으로 '감히'에서 나온다. 바로 '첫번째' 감히' 말이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과감하게', 감히 이야기하고, 감히 대항해야 한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정점'에서 권위주의 문화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위정자들이 반성토록 해야 한다. 자정(自淨)이 힘들다면, 강제로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김제동은 저들의 '감히' 앞에 '감히'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왜 겁이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가 성주에서 말했듯, '쪽팔리지 않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감히' 싸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한다. 혹시 나도 입버릇처럼 '감히'를 말하고 있진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감히'는 첫 번째 의미(두려움을 무릅쓰고 과감하게)인가, 두 번째 의미(자신의 신분이나 능력 따위를 넘어서서 주제넘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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