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미 비포 유>,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너의길을가라 2016. 9. 22.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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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작가로 전향한 유시민의 책 제목이다. '정치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돌아온 그는 '삶'을 이야기하면서 되려 '죽음'을 말한다. "사실 내 안에서의 출발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였다"던 그의 말은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기실 같은 것이고, 그리하여 삶과 죽음은 똑 닮아 있는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미 비포 유(Me Before You)>에는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윌(샘 클라플린)은 전신마비 환자다. 그는 촉망받는 젊은 사업가였고,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게다가 무려 성(城)을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유하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매력적인 남성이었다. 이런 설정들은 2년 전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돈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은 그의 현실과 처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척추가 손상된 윌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당연히 배변도 할 수 없다. 더군다나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스스로 6개월의 시한부 삶을 선포한다. 아들을 포기할 수 없는 부모에겐 '설득'의 시간이고, 아들에겐 부모를 납득시킬 '이해'의 시간이다. 물론 그 접점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죽고자 하는 의지와 살리고자 하는 의지의 충돌, 그 가운데 루이자(에밀리아 클라크)가 끼어든다. 


루이자는 6년 동안 일하던 카페가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 신세가 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에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려 노력한다. 그러다가 '간병인' 자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윌의 어머니의 면접을 통과한 그는 윌의 간호를 맡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루이자는 차츰 윌과 교감을 나누고 마침내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거 알아요? 아침에 눈을 뜨고 싶은 유일한 이유가 당신이란 걸." ()


자신을 웃게 하는 유일한 사람. 사랑하는 연인, 루이자. 죽고자 하는 자에게 '살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무게의 추는 움직일까. 윌은 뜻을 굽힐까. 사랑은 그 위대한 '힘'을 다시 재현할 것인가. 관객들은 윌의 선택에 귀를 기울인다. '놀랍게도' 윌은 죽음을 선택했던 자신의 판단을 그대로 밀고 나간다. 해피 엔딩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청천벽력이다. 윌을 향해 '당신은 이기적이야'라고 소리지르는 루이자와 같은 심정이 된다.


'삶'은 '판타지'가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이다. 영화는 전신마비 환자인 윌의 상황을 제법 그럴싸하게 그려내긴 하지만, 여전히 '판타지'가 섞인 시선을 유지한다. (윌이 엄청난 부자라는 걸 기억하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는 윌의 처지는 그야말로 처절한 것이다. 옷깃 안에 '택'이 붙어 있어 불편함을 느끼는 건 애교다. 잠깐 생각을 해보자. 당장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지 않은가? 




"고통스럽고, 불편하고, 충격적이며, 이는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다. 이는 내 삶을 끝내기를 원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이 이런 식으로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문제이다." (영국의 존엄사 운동가, 데비 퍼디)


잠깐 그럴 순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매일같이 그래야 한다면 어떨까? 씁쓸하지만, '사랑'도 하루 이틀이다. 루이자는 "당신이 원한 인생은 아니지만,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라며 윌의 마음을 돌려보려 하지만, "아뇨.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죠. 하지만 내 인생은 아니에요. 달라도 너무 달라요. 당신은 예전의 날 몰라요. 난 내 인생을 사랑했어요. 진심으로요. 난 이 삶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라고 단호히 말한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윌이 루이자를 '덜' 사랑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사랑'은 윌의 결정을 더욱 단단히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눈 앞의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을 수도, 다가가 품에 안을 수도 없는 자신을 견디는 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이기적'인 말은 하지 말자. 윌은 전 여자친구가 자신의 절친과 '바람'이 나고, 결혼까지 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사지가 마비된 젊은 남자가 다시는 예전처럼 살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삶을 끝내 달라며 부모님을 설득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솔직히 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끝까지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봤다.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하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삶을 충분히 즐기며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모두가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조조 모예스), <중앙일보>, 존엄사 그리고 희망을 다룬 '미 비포 유'


결국 루이자는 윌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물론 윌의 부모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결코 가벼운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누구나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진지한 고민과 판단 끝에 나온 것(어쩌면 설령 그러하지 않다고 하더라도)이라면 그것이 존중하고 '놓아주는 것'도 사랑의 한 모습이라 말한다. 


<미 비포 유>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언뜻 보이는 '로맨스'를 바탕으로 하면서 '존엄사(尊嚴死)'라고 하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영화가 제시한 '결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윌의 입장 또는 루이자의 입장, 더 나아가 윌의 부모의 입장에서 '존엄사'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미 비포 유>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죽음'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는 것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이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추상적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죽음 말이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 죽음을 위해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좋은 죽음은 곧 좋은 삶을 의미할 것이다. 


윌은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연인이 그의 꿈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마지막 배려를 남긴 채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그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유시민의 글을 덧붙이며 글을 맺는다.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죽음이 가까이 온 만큼 남은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삶은 준비 없이 맞았지만 죽음만큼은 잘 준비해서 임하고 싶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면서 잘 준비해야 그런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면 나는, 그렇게 웃으며 지구 행성을 떠나고 싶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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