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히말라야>가 말하는 휴머니즘이 불편하게 읽히는 이유는?

너의길을가라 2015. 12. 1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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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같은 날 동시에 개봉한 두 영화 <대호>와 <히말리야>의 맞대결의 승자는 <히말라야>였다. <히말라야>는 20만3161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대호>는 12만8394명으로 아쉽게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했다. 홍보전에서 <히말라야>가 좀더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스크린 수에서도 1,009대 892로 <히말라야>가 앞섰던 것이 승리의 요인으로 보인다. 



139분이라는 긴 런닝타임이 다소 부담스러운 <대호>에 비해 <히말라야>는 오락영화로서 적절한 125분이라는 런닝타임 안에 영화를 잘라넣었던 점도 경쟁에 있어 유리한 포인트였다. 무엇보다 좀더 '대중적'인 접근을 한 <히말라야>에 관객들의 마음이 먼저 움직였던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의 승자를 가늠하긴 어려울 것 같다. 


우선, <대호>가 평점에서 <히말라야>에 상당히 앞서고 있기 때문에 '입소문'이 관객 동원에 유효 변수로 작용하는 2주차 이후부터는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변수는 17일 개봉하는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라는 강적의 등장이다. <스타워즈>의 예매율은 CGV 기준으로 무려 63.1%에 이른다. 1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간 한국영화 두 편이 <스타워즈>의 강풍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을까?



<히말리야>는 '히말라야', 더 좁게는 '에베레스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등반'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지난 9월 개봉했던 <에베레스트>와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두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솔직히 <에베레스트>를 봤다면 촬영 기술이나 영상미 등에서 한 수 아래인 <히말라야>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지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에베레스트>가 고작 332,180 명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는 점이다.


<에베레스트>가 산에 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도전'을 다루면서도 인간이 가진 무모함과 오만함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비추면서 자연 앞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보여줬다면, <히말라야>는 '엄홍길'과 '휴먼 원정대'라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산악인들의 '동료애'에 집중한다. 이는 마치 자연을 거스르려는 인간의 아집처럼 보이기도 한다. 두 영화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에베레스트>가 재난영화가 흔히 갖는 갈등 구조나 감동 요소들을 배제했다면, <히말라야>는 차곡차곡 '신파'를 향해 흘러간다. 사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제작 윤제균'이라는 자막을 마주한 순간, 이 영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계산이 앞서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미 천만영화 <해운대>를 통해 윤제균표 재난영화의 수준을 확인했고, <국제시장>을 통해 윤제균표 감동영화의 흐름을 경험보지 않았던가? 


예상대로 <히말라야>는 구성이나 이야기 전개 방식이 매우 전형적이다. '신파'를 불러오는 한국영화 특유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초반부에 어설픈 웃음을 살짝 섞어가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다 갑작스럽게 '슬픔'으로 전환하는 방식 말이다. 시종일관 눈보라가 몰아닥치고, 매순간 위기에 봉착하는 이 영화가 어울리지 않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신파는 억지로 울리려고 하는거라고 생각한다. 그 우는 장면을 구구절절 길게 보여주면 부담스러운데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된다. '히말라야'는 그런 의도는 없다. 신파라고 생각되는 요소를 배제하려고 했다. 물론 이야기 자체가 갖고 있는 슬픔이 있지만 감히 '억지 신파'는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다. (이석훈 감독)


이석훈 감독은 "'억지 신파'는 없다"고 확언했지만,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이 영화의 기본적인 스토리는 결국 '자연스럽게' 신파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이럴 바엔 엄홍길 역을 맡은 황정민을 믿고 좀더 처절한 신파를 그려보는 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황정민에겐 그 어떤 신파조차도 관객에서 설득시키고마는 '힘'이 있지 않던가. 


다소 어정쩡한 영화가 되어버린 <히말라야>가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정복'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이 정상을 잠시 빌려주는 것일 뿐 사람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느냐. 내가 산에 올라간 것도 산이 나를 받아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엄홍길의 도전과 감동을 제대로 표현해냈는지 의심스럽다. 



"<히말라야>를 만든 건 당연히 관객 분들이 공감할 걸 믿기 때문이다. 보편성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데, 물론 걱정은 되지. 모든 걸 금전적 가치로 환산하는 사회이지 않나. 세월호도 인양하는데 돈이 얼마 든다고 계산하고, 왜 하냐고 반대하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면 <히말라야>가 이해 안 될 수도 있다. 무모해보이고 가치 없어 보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잖나. 요즘 우리는 너무 효율과 경제적인 걸 따지고 그게 마치 좋은 것인 양 포장하는데, 영화를 통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석훈 감독>


하지만 이석훈 감독이 <히말라야>를 통해, 엄홍길 대장의 '휴먼 원정대'를 통해 끌어오고자 했던 메시지는 어느 정도 전달이 된 것 같다. 물론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가치는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이 소중한 것이지만, 사지(死地)를 향해 또 다른 '한 사람'을 몰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현실을 감안한 결정을 내린 사람에게 '죄책감'을 떠안기는 구조는 온당한 것일까? 자신이 속한 집단을 끊임없이 위기 속으로 몰아넣는 리더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도전'은 '이기심'과 동의어로 읽히고, '의리'는 '불합리한 희생'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때로는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위대한 자연 앞에 숙연해질 필요가 있다. 포기해야 하는 순간과 돌아서야 하는 순간에서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고독은 얼마나 절실한가. '인간에 대한 예의' 못지 않게 '자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해발 8,750미터에 고인이 된 채 묻혀있는 동료를 데려오기 위해 명예도 보상도 없는 등반을 했던 엄홍길과 휴먼 원정대의 휴머니즘 가득한 여정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일말(一抹)의 불편함이 스쳐지나가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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