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세 모녀 자살에 대한 대통령의 현실감 없는 발언에 화가 난다

너의길을가라 2014. 3. 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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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이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거나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에서 상황을 알았더라면 정부의 긴급 복지지원 제도를 통해 여러 지원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 <연합뉴스>에서 발췌 -

 

朴대통령 "세모녀 자살 마음아파..민생챙겨야 새정치" <연합뉴스>

 

오늘(4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세 모녀가 생활고 끝에 자살한 사건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민생을 챙기는 무난한 발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내용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이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는다. 우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박 대통령이 언급한 세 모녀에 대한 '구원책'은 다음과 같다.

 

1.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거나

2.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에서 상황을 알았더라면..

 

과연 생활고 끝에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세 모녀가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대답은 '…….' 이다. 그와 관련한 내용은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의 인터뷰 내용을 확인해보도록 하자.

 

정관용 > 송파 세 모녀의 경우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청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만약 그분들이 기초생활수급자로 신청을 했다면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보세요?

 

허선 순천향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신청을 했다고 하더라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정관용 > 왜 그렇습니까?

 

허선 > 그게 그 3인 가구의 소득은 최저생계비 선상에 비슷하게 있지만 그 집에는 근로능력자가 세 명이나 있거든요. 61세의 아주머니도 결국은 능력자로 분류가 되고요. 그다음에 나머지 두 딸도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추정소득을 부과합니다.

 

"송파 세 모녀, 기초수급 신청해도 안 됐을것" <노컷뉴스>

 

 

 

- <JTBC>에서 발췌 -

 

대한민국에서는 세 모녀가 자살을 선택할 정도로 극단의 상황에 몰린 상황에서도 기초수급자 대상이 될 수 없다. 말이 되는 것일까? 물론 말은 된다. 형식이 실질을 잡아먹어버린 상황,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복지 현실이다.

 

다음으로 박 대통령이 제시한 두 번째 '구원책'인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에서 상황을 알았더라면' 에 대해 생각해보자. 물론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에서 이와 같은 상황을 알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것은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의 잘못은 아니다. JTBC <뉴스9>의 보도 내용을 좀 살펴보자.

 

기자 >오늘 정부가 복지 사각지대에 대한 일제조사를 하겠다라고 발표를 했는데요. 핵심은 3월 한 달 돼 온에 지자체 사회복지 공무원들이 직접 돌아다니면서 복지사각지대 계층들을 도와서 찾아주겠다라는 것인데요. 하지만 전문가들의 우려는 여전합니다. 왜냐하면 동반자살한 세 모녀의 경우를 보더라도 30대 딸들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지원을 신청했더라도 연령 등의 기준에 걸려서 아마 지원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손석희 앵커> 규정을 바꾸기 전에는 찾아내서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준다, 이런 얘기가 되잖아요.

 

기자> 네, 그렇습니다. 획일적인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죠. 또 하나는 사회복지사의 수가 적다는 뜻인데 2명이 3만 명을 조사해야 되는 이런 상황들 때문에 정부의 조사에 대한 의문, 실효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마다 사정이 조금은 다를 수 있겠지만, 현재 사회복지사의 수는 현재의 선별적 복지제도를 감당하기에 현저히 부족하다. 기자의 말처럼 2명이 3만 명을 조사한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일까? 아무리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 정도의 업무량이면 자포자기의 심정에 도달할 것 같다. 과거에 사회복지사가 과중한 업무 탓에 투신 자살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가?

 

이와 같은 상황들을 고려해본다면, 박근혜 대통령의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가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은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잠꼬대에 불과한 것이다. 설령 관할 구청이나 주민센터가 알게 돼서 '긴급복지지원'이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이는 2~3개월 짜리의 단기적인 대책에 지나지 않는다.

 

 

- <한국일보>에서 발췌 -

 

더군다나 박근혜 정부는 세 모녀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다. 박근혜 정권 출범 첫 해에만 기초생활수급자 3만 7천여 명이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수는 최근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상황이다. 이것이 기존의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사람들이 가계 소득이 올라서 생활에 지장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빈곤층 관련 예산이 줄면서 기준이 강화된 탓에 벌어진 일이다. 실제로 빈곤층 관련 예산(기초생활수급 예산)은 3초 3,635억 원으로 557억 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는 지난해 집행 예산보다 1.6% 늘어난 것으로 자연증가분에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복지여건이 아직 충분하지는 않지만 있는 복지제도도 이렇게 국민이 몰라서 이용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없는 제도나 마찬가지다. 있는 제도부터 제대로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접근도 용이하게 해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 앞으로는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더욱 강화하고, 절박한 분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릴 방안을 찾기 바란다. 시민·복지단체 등 민간과도 협력해 어려운 분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보완 방안을 강구해주기 바란다"

 

자, 이번에는 조금 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을 다뤄보기로 하자. 박 대통령은 복지 제도를 '국민이 몰라서 이용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내놓은 대책이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일견 타당한 말이다. 있는 제도조차 활용하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례를 줄여가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대통령의 발언들은 여전히 '복지'가 '시혜'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으로 이해된다.

 

과연 '복지 제도'는 '시혜'일까? 조금 과하게 표현하다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복지 제도들은 '구걸'에 가깝다. '내 처지가 이 정도로 어려우니까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말 비참한 일이다. 가난이 죄악이라고 여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가난해요'라고 말하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 <연합뉴스>에서 발췌 -

 

우리는 출생'되어'진다. 태어나지는 것이다. 이는 철저히 수동적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물론 더욱 열악한 환경의 국가들도 많다. 하지만 훨씬 더 좋은 국가들도 많다.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도록 하자.) 국가 혹은 정부의 역할이 무엇일까? 출생되어진 국민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다. 단순히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넘어서 그 구성원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삶을 설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겨우겨우 버틴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기본적인 세팅조차 마련해놓지 못한 국가가 개인에게 각자도생할 것을 강요한다면 그 구성원인 국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복지는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시혜가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기본 사양이다.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고, 광범위하게는 이미 그렇게 (알게 모르게)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별적'이라는 차별적 언어와 함께 복지라는 것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다. 지원을 받고 싶으면 '너의 가난함을 밝히라'고 말하는 정부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는 기초수급을 받을 정도로 가난하지 않으니까 상관없어'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그 비겁함이 결국 우리를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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